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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deer Dec 02. 2022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2022-12-01

암울한 현실일 수도 있는 것들이 아버지에게는 오히려 인생에 활력을 가득 불어넣고, 아버지가 크고 대범하게 살도록 만들었다. 나는 평생 광대 신발을 신은 허무주의자 같은 아버지의 발자국을 따라 걸으려 노력해왔다. 우리의 무의미함을 직시하고, 그런 무의미함 때문에 오히려 행복을 향해 뒤뚱뒤뚱 나아가려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항상 그런 일을 잘했던 건 아니다. 너는 중요하지 않아는 내게 종종 아버지와는 다른 효과를 냈다. p.58.


여덟 시 반쯤 일어나 아침으로 오이 토스트와 피넛버터 바나나 토스트를 만들었다. 수요일에 찬스 에스프레소 바에서 받아 온 원두를 갈아 커피도 내렸다. 12월의 첫날이구나, 2022년의 마지막 달이 시작됐구나, 흐으음, 하면서 달력도 넘겨두었다. 아직도 뭘 하고 싶은지 정확히 모르지만, 뭐든 해보자는 생각으로 온라인 강의 하나를 신청해 듣기로 했다. 마침 미끼 이벤트도 하고 있었다. 의욕이 (일시적으로) 충만한 데에는 거의 매일 업데이트되는 내 인스타그램 컬렉션 'INSPIRATION' 폴더에 추가된 최재천 교수의 인터뷰 클립이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주어진 인생 살지 말아라. 악착같이 찾아라. 온갖 걸 한번 다 뒤져봐라. 내가 진짜 좋아하는 일이 뭘까. 난 눈만 뜨면 이 짓 하고 싶은데 뭐 이런 거 없나 뒤져보고, 그런 일 하는 사람 찾아가 보고, 그런 일 하는 사람이 쓴 책 읽어보고, 그런 사람이 하는 강연 가서 들어보고. 두들겨보고, 찢어보고, 열어보고, 막 해봐라. 그런데 막상 가서 두들겨보고 이렇게 뒤져보면 아니라는 걸 발견할 때가 훨씬 많다. 아 이것도 내가 생각하던 그런 세계가 아니네. 근데 어느 날, 과학자가 할 얘기는 아닌데, 어느 날 그냥 고속도로 같은 도로가 눈앞에 그냥 뻥 하고 열린다, 내 경험에 의하면. 어? 이런 길이 있었네? 난 왜 몰랐지? 그때부턴 그냥 달리면 된다. 그냥 달리면 성공하더라." 이십 대 청춘에게 바치는 노학자의 메시지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지금 힐끔 찾아보니 무려 오십 대를 타깃(?)으로 한 전성기TV라는 채널의 인터뷰 내용이었네. 열쩡, 열쩡, 열쩡!

(+ 혹시나 궁금할 분들을 위해 공유해보는 인터뷰 풀 영상 좌표 : https://youtu.be/PCo56hCY-Z8 )


아무튼 건강과 시간이 허락하는 한 뭐든 배우고 해 보자고 마음을 고쳐먹고 - 연말이고 여러 상황이 있는지라 그럴 수밖에 없는지도 - 온라인 강의를 들으며 나름대로 알찬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나서야 책을 펼쳤는데, 식상한 표현이지만 너무나 흥미진진해서 단숨에 절반 정도를 읽어버렸다. 작가도, 주인공도 너무 궁금한데 그건 내일 검색해보기로 하고 일단은. 소설 속 화자가 아직은 몹시 궁금해하는 것처럼, 그래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혼돈을 향해 계속 바늘을 찔러 넣도록 한 것'이 무엇인지 나도 너무 궁금하다. 아, 그리고 온갖 과학 용어들, 라틴어들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너무 시적이고 오묘하고 아름다워!". (이렇게 말하면서 만화 속 순진한 소녀 같은 눈빛을 발사해준다) 가끔은 내가 수학이나 과학에 전혀 재능이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라틴어를 배우지 못한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과학자의 이야기다 보니 재미있게 읽었던 호프 자런의 <랩 걸> 같은 책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내일은 뒷부분을 마저 읽어야지. 작가에 대해서도 알아봐야지.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혼자 마음이 아주 바쁘다. 괜찮은 기분이다.


결코 승리하지 못할 거라는 그 모든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로 하여금 혼돈을 향해 계속 바늘을 찔러 넣도록 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가 우연히 어떤 비법을, 무정한 세상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어떤 처방을 발견한 게 아닐까 궁금했다. 게다가 그는 과학자였으므로, 나는 무엇이든 끈질기게 지속하는 일에 대한 그의 정당화가 내 아버지가 심어준 세계관에도 들어맞을 수 있을 거라는 작은 가능성을 꽉 붙잡고 놓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무언가 핵심적인 비결을 찾아냈을지도 몰랐다. 아무 약속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희망을 품는 비결, 가장 암울한 날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비결, 신앙 없이도 믿음을 갖는 비결 말이다. p.66.


어쩐지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의 한 장면이 생각난다. 세이모어가 거리를 걸어가고, 그 뒷모습 아래로 자막이 떠 있는 장면이다. "안정적이고 행복한 삶의 비밀을 원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이 책의 앞장에 써두었듯이 그런 비밀은 없는 것이 결말일까? 나는 아직도 어떤 질서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힌 채 바보같이 살아가고 있는 걸까? 인생에는 아무 의미도 없고, 신도 없는데, 그런데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행복을 향해 뒤뚱뒤뚱 나아가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가?


혼돈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이라는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나는가' 하는 시기의 문제다. 이 세계에서 확실한 단 하나이며,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주인이다. p.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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