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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deer Nov 29. 2022

인생의 역사

2022-11-29

그것을 니체식으로 '원한 없는 삶'이라 부르고 싶다. 내 삶이 어떤 고통과 슬픔으로 얼룩졌더라도/얼룩지더라도 내 운명을 원망하지 않겠다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윤동주의 같은 제목의 시에서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고요히 걸어가겠다는 다짐으로서의 서시. 그런데 서시란 서문을 대신하는 시이므로 시집 맨 앞에 있어야 할 텐데 어째서 한강의 ⎡서시⎦는 시집의 끝에 있는가. 죽음에 대한 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인생의 끝에서야 쓰게 되는 서시 같은 것이므로. 그때야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다시 처음인 듯 살아가고 싶어 지니까. 그러나 그건 너무 늦지 않은가. 그러니 나는 미리 써야 하고 매일 써야 한다. 나는 죽는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그 시를. p.156-157.


이 책을 받아서 읽기 시작하고 여러 번의 아침이 지났다. 무언가를 써보리라, 생각만 하고 지나간 날들이 아주 여럿이라는 뜻이다. 아무것도 쓰지는 못했지만, 오늘도 아침은 챙겨 먹었다. 책은 반 정도 읽었는데 벌써 읽다가 멈춘 적이 여러 번이다. 꼭꼭 씹어 삼켜야 할 문장들이, 밑줄 치고 싶은 내용들이 많았다. 게다가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와 게으름과 무심함 사이로 어떤 '사건'이 생겼고, 그제야 서랍을, 오늘 다시 열어본다.


그 '사건'은 동료가 아픈 것이다. 퇴사 후 둘이서 일해보기로 하고 합을 맞춘 지 고작 5개월이 되었는데, 친구가 덜썩 암 선고를 받았다. 그 소식을 들은지는 일주일 남짓, 몹시 당황스럽고 안쓰럽고 마음이 안 좋은 것은 물론이고 당장 현실적인 문제들로 아주 심난하다. 정말이지 사람의 일은 알 수가 없는 것. 지금까지 겨우 배운 것이 그거다.


일요일 아침에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를 봤다. 아주 신선하고 독특하고 인상적인 영화였지만, 후반부에서 살짝 지루해졌는지 어쨌는지 잠깐 졸았다. 그래도 결말이 훌륭했다. 메시지도 명확하고. Nothing Matters.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삶을 소중히 여길 것. 정신을 차리고 끝까지 싸우려고, 버티려고, 나름대로 애쓰고 있다. 이제야 겨우 중간쯤 왔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너무 늦지 않게, 미리 써야 하고 매일 써야 한다. 나는 죽는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그 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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