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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deer Jun 14. 2022

스포츠와 여가

2022-06-14

그들이 내 대답을 기다린다. 다음 순간 물론 그 모든 마법은 풀려버린다. 내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들키고 만 것이다. 그 사실이 좀 거북하다. 외국어 억양이 전혀 없이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 듣고 이해할 줄은 안다고들 하던데. 불가능하겠지만, 라디오에서 나오는 모든 이야기와 노래 가사를 알아듣고 싶다.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다. 내가 나오자 문 안쪽에 달린 작은 종이 울린다. 그것으로 끝이다. p.21.


일시적 백수가 된 지 이틀 째. 느긋하게 일어나 아침을 차리다가 갑자기 이 책의 제목이 입가에 맴돌아 먼지 쌓인 책장에서 꺼내 들었다. 분명 다 읽었는데 전혀 처음 읽는 느낌. 책 속 문장들처럼 투명하고 조용하게 지나가버린, 아니 사라져 버린 듯하다. 그런데도 남아 있는 어떤 것들은, 이제 지워버려야 하나.


요즘 토요일 오후마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광나루 한강공원까지 가서 테니스를 치고 온다. 일주일에 두 번 실내 테니스장에서 레슨을 받고 있는데, 그걸론 모자라지. 레슨 받는 사람들과 레벨을 나눠 스윙 연습, 랠리 연습, 서브 연습을 함께 하고 미니 게임도 해본다. 롤랑가로스 중계와 유튜브를 보면서 자라난 의욕과 희망은 코트에서 어김없이 좌절과 실망으로 바뀌지만, 순수한 재미와 작은 기쁨 때문에 포기는 못 한다. 어렵지만 즐겁고, 순간에 집중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 온갖 생각과 근심과 걱정과 불안과... - 하지 않게 된다.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는 편이 차라리 덜 힘들다. 살기 위해서 테니스를 친다는(운동을 한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문득 책 제목이 절묘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쿠란에서 따온 것이었다. 맨 앞 장에 이렇게 인용해 두었다.


현세의 삶이란 한낱 스포츠와 여가일 뿐임을 기억하라. 
- <쿠란> 57장 ⎡무쇠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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