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13
세상에 '잊기 좋은' 이름은 없다. p.300.
무언가를 써보겠다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만 하다가 오월 중순이 되었다. 어쩌면 내 삶도 그런 것 같아서 속에서 열불이 치민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만 하다가, 아니 숨만 쉬다가,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로 인생 중간쯤에 와버린 것만 같다.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만 하는 것도, 아니 숨만 쉬는 것도 힘들다고 징징거리면서 이대로 대혼돈의 멀티 유니버스를 지나는 중인 건지.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 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괴롭다. 앞으로도 아무것도 못 될까 봐 너무 두렵다.
오늘은 프란츠에서 김애란 작가의 강연을 들었다. 사인받을 책은 2권 이하로 준비해 달라는 문자를 받고서 책장으로 달려가보니 <달려라 아비>, <두근두근 내 인생>, <바깥은 여름>이 포개어져 있었고 에세이를 모아둔 한편에 <잊기 좋은 이름>이 있었다. '소설의 음계, 삶의 사계'라는 오늘 강연 제목에 부러 맞춘 것은 아니었지만 <바깥은 여름>과 <잊기 좋은 이름>을 챙겨 간 것이 마침 잘 맞는다 생각이 들었다.
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잊기 좋은 이름>에 책갈피를 꽂아 둔 뒷부분부터 슬쩍 다시 읽는데, 자꾸만 울고 싶어 져서 혼났다. 정말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고, 휴지나 손수건도 없고. 급기야는 콧물이 나려고 해서 킁킁대다가 겨우 진정하고 스타벅스에 들러 시원한 커피를 한잔 마셨다. 강연 도중에도, 맨 앞 줄에 앉아서 작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며 깔깔 웃다가도, 눈물을 꾹꾹 참아야 했다. 강연 주제에 맞춰 작가가 인용한 본인의 작품 속 대목을 읽다가 그랬다. 내용이 슬퍼서 그렇기도 했고, 내가 이상해서 그렇기도 했고.
강연을 들으며 메모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조금 후회된다. 칼국수집 중앙에 놓여 있던 삼익 피아노 이야기, 책 읽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 창작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 문학이나 소설가의 역할에 관한 이야기, 군데군데 웃음 짓게 만드는 그러면서 생각하게 하고 귀 기울이게 하는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 불안정한 듯한 목소리로 준비해 온 대본을 그대로 읽으면서도 씩씩하고 다정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 많.관.부! - 작가의 모습이 감동적이기도 했고, 그 자체로 너무나 좋은 사람이구나 감탄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아무런 질문도 못했고. 돌아오면서 글을 쓸 때 어떤 프로그램을 쓰는지 물어볼 걸, 하고 잠깐 생각하긴 했다.
그러니까 강연도 너무 좋았고, 작가도 너무 좋았는데. 사인할 때 이름을 잘못 쓰고 싶지 않아서 휴대폰 메모장에 이름을 적어 보여달라고 요청한 것이며, 끝나고 뭐 하냐는 물음에 집에...라고 대답했을 때 아쉽네요라고 말했던가, 여긴(프란츠) 자주 오시냐 물어봐주었던 것도, 모조리 다 좋았다, 다 좋았는데. 그 모든 요소들 중에서 딱 하나, 나만 싫었다고 해야 할까. 나 요즘 자기혐오가 극에 달한 걸까. 질투 같은 것도 아니고 - 그럴 리가 - 자괴감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딱히 작가만이 아니라 참석한 사람들이며 그 공간과 시간에 있던 모든 요소들 가운데 '나'만 싫었다. 텅텅 비어있고 뭘 해도 어설프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나만. 아 실은 그게 오늘 그 공간과 시간만이 아니긴 하다. 어젯밤인가 오늘 아침에는 요즘 사는 게 정말 지독하게 재미가 없구나, 내뱉을 뻔했으니까. 나는 결국 아무것도 안 되겠구나, 싶었으니까. 쓰다 보니 뭘 또 이렇게까지 싶기는 한데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하다.
물론 그런 생각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뭐라도 쓰고 있는 지금의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 주고, 뭐라도 읽고 싶어 지도록, 아주 작은 의욕이라도 내볼 수 있도록, 그냥 잠들지 않도록 해준 만남이었다. 필터 없이 계속해서 뭐라도 끄적이는 시간을 다시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살아야지, 반드시 실패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써야지, 뭐 그런 생각들 말이다.
모르겠다. 여전히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떻게 하면 내가 행복해지는지를 잘 아는 편'이라던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의 멋진 말에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마음이 복잡한 요즘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잘하는 것 하나 없고, 행복해지기는 커녕 매일 우울해지고. 실망하고 또 하고 - 아니 도대체 뭘 기대한 건데? - 생각하고 또 하고. 외로워하고. 불안해하고. 애쓰고. 이게 다 뭔가 싶고. 내가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고. 진짜 모르겠다. 좋아하는 것 많고, 하고 싶은 것 많고, 되고 싶은 것 많던 나는 어디로 갔을까.
키보드를 두드리는 감각이 좋다. 지금 문득 든 생각이다. 나는 여기 있는 걸까. 그렇다면 계속해볼까.
- 인간은 참 이상해……. 그렇지? p.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