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30
거리에서 단조로운 노랫소리가 들렸다. 실연을 슬퍼하는 하심 노인이었다. 나이 많은 그 노인이 애달퍼하는 사랑이 과연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사랑의 열병을 앓는 사람을 뜻하는 아랍어 '마즈눈'이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밤이면 텅 빈 거리를 돌아다니고 한구석에 앉아 울면서 새벽이 올 때까지 서글픈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단조로운 멜로디 덕분에 나는 금방 잠이 들었다. 나는 벽 쪽으로 돌아누워 어둠과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생은 여전히 멋졌다. p.117.
역시 며칠이 지난 책과 아침이지만, 작은 기쁨의 순간을 메모해두고 싶어서 지금이라도 쓴다. 그래도 뭐 아침 메뉴는 오늘과 비슷하네. 아무튼 이 날 아침에 이 책을 꺼낸 것은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움직이는 조각(kinetic sculpture) 작품 릴스를 봐서다. 바로 작품 제목이 'Ali and Nino'였던 것. 알리와 니노라니, 세상에! 괜히 흥분해서 올리 언니에게도 딸기에게도 게시물을 공유하고 작품과 작가에 대해 알아보기도 했다. 작품은 조지아의 바투미에 있다고 한다. '조지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흑해 연안의 휴양 도시'라고 하는데, 평생 가 볼 일이 있을까 싶고. 소설의 배경인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처럼, 내게는 아주 멀고 아득하고 신비로운 세계. 조지아라는 지명은 며칠 전 넷플릭스로 <브레이크 포인트>를 보다가 또 들었는데. 어느 선수가 언급했었나, 그 순간에 메모해두지 못했다. 이 책의 작가 쿠르반 사이드 역시 필명으로 추측만 할 뿐 누구인지 정확히는 아직도 모른다고. 이 소설은 영화화된 적이 있고, 아마도 그 해 여름에 그 사람의 집에서 봤던 것 같다. 영화는 별로였지만, 그래도 그냥 좋았었다. 남자와 여자, 동양과 서양, 전쟁과 사랑, 삶과 죽음.
집 앞 카페에서 이걸 적고 있다. 어떤 책은 어떤 문장 때문에 몇 번이고 펼쳐보게 된다. 저런 문장을 어떻게 한 번만 읽을 수 있겠나. 여름이면 종종 꺼내보는 책이라고 했더니 딸기가 멋지다고 해줬다. 책장에 여름 코너가 있는 것은 안 비밀인데. 사실 그렇게 여름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겨울 코너는 왜 없지?
이 책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서 썼다 지웠다 하고 있는 지금. 창 밖으로는 햇살이 뜨겁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머리칼을 흔들 만큼 바람도 조금 불고. 혼자 큰 테이블 구석에 앉아 뭐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여보는 지금. 어디로라도 떠나고 싶고 그런 것은 아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상상 속에서, 오감으로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 써야 할까, 어떤 장면, 단어 조각들이 둥둥 떠다니고,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속으로 조용히 생각하는 일들, 몰래 느끼는 감정, 허리는 괜찮은 듯 아프고, 세탁기가 다 돌아갔으려나, 일기조차도 정돈되게 쓰지 못하는 요즘이네, 일을 구해야 할 텐데, 수수랑 보리는 낮잠을 자고 있겠지, 집 아주 가까이 맘 편히 노트북 들고 올 곳이 생겨서 기쁘다, 주절주절 오늘도 손가락 운동, 뭐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 밥을 먹고 씻고 읽고 쓰고, 장마라더니 오늘도 비가 안 온다, 벌써 수요일, 책에 집중할 수 없는 날들이지만 언제는 뭐 안 그랬나, 조금 무던해지자, 조급증을 버려, 온갖 정보와 조언과 메시지와 생각으로 가득한 오후 네 시.
나는 옥상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마치 낯선 마을, 낯선 지붕, 그리고 낯선 풍경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말없는 바다와 고요한 사막, 그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오래된 도시를 사랑했다. p.14
나는 밤의 부드러운 웅얼거림, 옥상 위에 솟은 달, 뜨거운 오후 모스크 앞뜰의 고요하고 명상적인 분위기를 사랑했다. p.28.
+ 28일에 쓰던 것을 약간 수정했다. 시간과 공간이 뒤죽박죽으로 섞였지만, 뭐 아무렴 어때. 그리고 방금 용기를 내서 연락해 본 곳에서 꽤 좋은 소식을 들었다. 잘했다 나야. 멸종 위기에 처했던 '의욕'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죽기 전에) 진짜로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보고 계획도 다시 좀 세워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일단 카페에서 나가서 머리를 다듬고 저녁을 해 먹고 테니스를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