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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 little deer Jul 15. 2023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

2023-07-14

아무튼 이제 나는 밤을 반납할 준비. 아침엔 알람이, 이어서 러시아워가 나를 기다릴 것이다. 평일 낮에 카페에 간다면 미팅 때뿐일 것이고 읽고 싶지 않은 책을 읽을 때가 많을 것이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자주, 혹은 매일 만날 수도 있으며 해가 지면 어김없이 피로에 휩싸일 것이다. 그래서 밤엔 잘 것이다. 아주 곤히. p.186.


7시 기상 미션은 오늘도 실패. 그래도 9시면 선방이지. 11시 40분까지 병원에 가야 해서 따뜻한 물을 마시고 유산균을 챙겨 먹고 아침을 차렸다. 어젯밤 특강을 들으면서 알라딘에 접속했는데, 강사가 보라는 건 안 보고 '24주년 특별 선물 - 듄 티셔츠' 광고 배너에 흥분해 버렸다. 대상 도서부터 고르고 골라 장바구니에 담은 후에 - 필립 로스의 <왜 쓰는가> - 보관함에 담아두었던 책 몇 권을 더해 결제해 두었더니 아침에 문 앞에 책이 와 있었다. 잔뜩 신나서는 'ARRAKIS'가 프린트된 티셔츠에 맞춰 형광 오렌지색 반바지를 입고 가방에 책을 넣고 집을 나섰다.


하루종일 비 오고 습한 날씨. 에어컨을 제습 모드로 해놓고 끌 수가 없는 날씨. 집에 오면 설거지와 청소가 - 빨래도 해야 하는데, 날씨 탓을 하면서 미뤄준다 - 기다리고 있지마는 분명 아몰랑 하면서 침대에 드러누울 것이 뻔해서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 들렀다. 따뜻한 플랫화이트 한 잔을 시켜놓고 단숨에 책을 읽었다. 다음주가 지나면 이제 이런 시간도 쉽게 오지는 않으리라.


김영민 교수의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읽고 이 책을 담아두었더랬다. 작가와 포개지는 부분이 많(게 느껴졌)다. 같은 나이(꿀꿀!)부터 여동생과 조카, 비슷한 일상, 성향이나 기질이나 성격이나 생각 같은 것. 굳이 공통점을 발견해 가며 괜스레 기분이 좋아질 만큼 내게는 너무나 훌륭한 에세이스트로 느껴졌다. 접어두고 싶은 페이지가 여럿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읽어내려가면서 (속으로) 울다가 (표정만) 웃다가 그랬다. 


책에서 록산 게이의 <헝거>,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끈이론>을 발견하고 바로 보관함에 담아두었다. <헝거>는 절판이라 중고책을 찾아봐야겠네. <천천히, 스미는>은 책장에 있으니 다시 펼쳐봐야겠고.


낮에 책을 읽는 동안 붙잡아두고 싶었던 글자와 페이지, 솟구쳤던 생각들은 그새 희미해졌다. 집에 돌아와 설거지를 하고, 수수보리 화장실을 치우고, 가지 덮밥을 해 먹고, 재테크 공부를 하고, 드라마 <악귀>를 챙겨보는 사이에 말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일단 한번 만났으니, 그때그때 또 만날 것이다. 밤이 된 지금은 그냥 무엇이라도 쓸 수밖에 없는, 쓰지 않으면 아니 되겠는,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마음들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에는 하루 여덟 시간의 근무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태어나는 수많은 키친 테이블 라이팅kitchen table writing이 있다. 아니, 키친 테이블 라이팅이 아닌 글이 얼마나 될까. p.31'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여본다. 매일 '망했다'고 말하는 나라도 - 문득 <유퀴즈온더블럭>에 출연한 이금희 아나운서의 말이 생각나서 찾아본다. '망했다'라는 말보다는 '망쳤다'는 말로! - 아무 상관없잖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사는 게 새삼 힘들 때 생각한다. '어쩌다-이렇게-되었지?' 먼저, '어쩌다'부터. 나의 현재를 만든 원인들을 돌이켜본다. 게으름? 무능? 잘못된 선택? 금수저 아님? 알 수 없다. '그렇게 될 일은 결국 그렇게 된다'고, 인디언들은 말했다지 않은가. 두 번째, '이렇게'에 대하여. '이렇게' 사는 것은 어떤 것인가. 나는 불행한가? 항상 불행한 것은 아니다. 그럼 항상 행복한가? 물론 아니다. 항상 불행하거나 항상 행복한 상태가 가능한가? 아닐 듯하다. 그럼 '이렇게'란 무엇인가? '이렇게'가 무엇인지 콕 집어 설명하긴 어렵지만 '이것'이 내가 예상했던 삶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다. 내가 예상했던 세상이 아니라는 것도. 삶은 예상보다 매번 더 곤란하고 세상은 예상보다 매번 더 나쁘다.
그럼 마지막, '되었지'에 관하여. 삶은 완결되었나? 그럴 리가. 세상은 완성형인가? 그렇지 않다. 삶도 세상도 끝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쩌다' '이렇게' 살고는 있지만 아직 '되었다'고 할 순 없다는, 그 간단한 진리를 알려주려고,
비가 내린다.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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