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래분수 Aug 04. 2022

김치 장사꾼의 마르지 않는 샘

이 시절, 남기고 싶은 것

김치 만드는 날엔 하루 12시간, 길게는 열댓 시간쯤 일한다.

하루 9시간 정도씩 일을 배분하면 좋겠지만, 시시각각 시드는 채소나 절인 배추를 두고 볼 수만은 없다. 그렇게 며칠 일하고 나면 그 뒤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여기저기 돌아가며 쑤시고 저린데, 사실 몸보다 정신이 더 피폐하다.

그래도 또다시 김치를 만드는 이유는 이런 말들 때문이다.

     

이거 진짜 맛있는데요?

딱 제 마음에 들어요.

마트에서 파는 것과 달라요.

뭐랄까, 엄청 신선한 맛이에요.      


지난 주말 장터에서는 어떤 손님이 매운 김치와 무김치 맛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일본에 살면서 한국 여행 많이 했어요. 그러다 한국 음식에 푹 빠졌고요. 그리고 제가 LA에서도 꽤 오래 살아서 김치 맛 좀 알거든요? 그런데 이 김치 정말 맛있어요.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래도 손님의 진심 여부를 분간하는 건 이제 어렵지 않다.      


김치가 정말 좋아서 맛보는 사람

김치 맛이 무지 궁금했던 사람

맛만 보려는 사람

그런데 맛이 좋은 바람에 진짜로 사는 사람

맛만 보고 쭈뼛거리며 멀어지는 사람

생각했던 맛이 아니었던지 건조한 인사를 남기고 돌아서는 사람

그리고 아주 가끔이지만 3~40년 전 경험을 바탕으로 김치는 진짜 별로라는 걸 피력하는 할아버지들 (가던 길 멈추고 안 해도 될 말을 굳이 하는 거 보면 이분들 진심이심)     


장터에서 김치 판 지 4년쯤 되니 훤히 보인다. 아무래도 괜찮다. 맛만 보고 사지 않는다고 야속하진 않다. 매해 매출은 늘고 특별히 홍보하지 않아도 팔리기에 마음이 여유로운 모양이다. 누군가 우리 김치 맛을 봐주는 게 고맙고, 김치 맛이 궁금했던 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할 수 있어 기쁘다. 지역 공동체 안에서 작은 몫을 한 기분이랄까.


한국에서 살았어요.

하와이 살면서 한국 음식에 푹 빠졌죠.

뉴저지 살다 이사 왔거든요.

예전에 제 친구/친구의 어머니/이웃이 한국 음식 만들어줘서 많이 먹었거든요.


이렇게 구태여 과거를 설명하면서, 우리 김치에 대한 자기 평가의 신뢰성을 증명하려는 노력이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김치를 처음 맛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감격스럽다.


이게 김치라고요?

생각지 못한 맛이에요.

음... 이거... 괜찮은데요?       


열에 아홉은 김치 맛에 놀라워한다. 그런데 김치를 피클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나는 한마디 덧붙인다.      


김치는 피클이 아니에요. 김치에는 식초를 쓰지 않아요. 채소와 소금만으로 발효한 거예요.


그럼 그들은 놀란 토끼 눈을 한다.      


피클이 아니라고요?

이게 식초 맛이 아니라고요?      


아이들이 김치 맛에 눈을 뜰 때도 기쁘다.

올해 첫 장터에서 김치를 맛 본 한 가족이 있다. 작은 병 하나를 사 갔고, 일주일 뒤 다시 온 가족이 출동했다. 이번에는 큰 병을 세 개나 샀다.


얘가 정말 좋아해요.


부부가 열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딸을 가리키며 말한다.

내가 과장되게 놀란 얼굴로 쳐다보니 아이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맞아요! 정말 맛있어요. 김치 너무 좋아요.      


지난 주말, 다섯 명 가족이 들렀는데, 그중 한 명 빼고 모두 김치를 처음 먹어본다고 했다. 그중 어른 둘이 시식 후 말했다.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맛인데요? 맛이 꽤 좋아요.


그러자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되었을 남자애가 자기는 백김치를 먹어보겠다고 했다. 나는 맛있어 보이는 도톰한 줄기 쪽을 골라서 시식용 컵에 담아 주었다. 아차, 그런데 배추 조각이 너무 큰 듯하다. 내가 후회하는 짧은 사이 아이는 배추를 찔끔 깨물어본다. 곁에 있던 엄마가 말한다.


싫으면 엄마 줘도 돼.


그러자 아이가 천천히 말을 잇는다.


이거... 이거 괜찮은데요?


둘러싼 어른들이 빵 터진다. 그럼 신이 난 내가 덧붙여 말한다.


요거 에그 스크램블에 얹어 먹어보세요. 아니면 타코나 핫도그, 버거도 좋고요. 그리고 라면에 넣으면 새 세상이 펼쳐질걸요?


한국인이 듣기에 좀 이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김치 올린 달걀 요리를 정말 좋아한다. 샐러드나 샌드위치에 넣어 먹는 이들도 많다.


가끔 한가하거나 계산하는 사이, 때로는 스몰 토크가 필요한 순간 내가 묻는다.      


보통 어떻게 김치를 드세요?      


달걀이나 핫도그, 타코, 라면, 볶음밥 등 저마다 취향이 다양한데, 이런 대답도 꽤 많다.      


김치? 그냥 먹죠. 배고파서 스트레스받아서 맛있어서 그냥 스낵처럼 먹어요.      


백김치 올린 소시지


올해 김치 왕으로 등극하신 밥 할아버지는 유럽 여행 뒤 한 달 만에 연락이 왔다.


지금 비행기 탈 거야. 금요일에 도착하고 일요일에 김치 사러 갈 거니까 내 분량 챙겨놔 줘!


반가운 마음에 나는 전에 없던 파격 할인을 해주고, 직접 수확한 꿀 한 병까지 챙겨드렸다.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자네 같은 자본주의자가 웬일이냐며, 혹시 아픈 거 아니냐며 농담 건네며 좋아하셨다.     


올해 첫 장터에서 우리 김치 맛을 본 젊은 커플은 우리 부스에 들르는 주기가 점점 짧아진다.     


큰일이에요. 처음에는 작은 병이 2주 갔는데 이젠 큰 병이 1주일도 못 가더라고요.      


역시 올해부터 단골이 된 호리호리한 남남 커플은 이번 주에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둘은 무김치와 안 매운 배추김치 값을 치르더니,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목소리를 낮춰 말한다.


이 장터에서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부스가 여기란 거 알아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나도 입가에 손을 대고 속삭이듯 말한다.


진짜요? 너무너무 기분 좋네요! 고마워요!


그리고 이 모든 말을 곁에서 들은 다른 손님들도 따뜻하게 웃어준다.     


얼굴이 익숙한 걸 보니 적어도 2주에 한 번은 들르는 것 같은 부부가 있다. 아저씨는 내가 다른 손님을 상대하는 사이, 김치를 처음 사본다는 한 아주머니의 궁금증을 나서서 풀어준다.


이거 어떻게 먹느냐면요, 볶고 지지고 뿌리고...


등등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뒤 아주 매운 김치 두 병을 사시곤 자리를 떠나려는데, 다음 손님이 부부에게 물었다.


이 김치, 맛이 괜찮아요?

오, 예스! 이거 진짜 맛있어요.


아저씨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우리 김치 홍보에 열을 올린다. 결국 내가 나설 차례다.


아무래도 여기서 저랑 같이 김치 파셔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한바탕 웃고 몇 손님은 물러가고 새 손님이 내 앞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런 손님들이 있다.


어! 저기 김치 판다! 


배경 음악처럼 웅웅대는 온갖 영어 대화 사이에서 ‘김치’라는 단어만은 내 귀에 콕 들어온다. 그 말을 한 사람은 곧장 우리 앞으로 다가오기 마련. 눈을 반짝이며 내게 묻는다.


김치 시식할 수 있는 거예요? 저 김치 진짜 좋아하거든요!


이런 분들은 맛보고 대화 나누는 내내 설렌 미소를 띤다.     


김치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법은 쉽다. 김치를 맛보고 내뱉는 감탄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그들은 눈을 감고, 으음, 또는 아아, 으으음 같은 신음을 뱉는다. 글로 옮기니 좀 이상한데... 아무튼 그렇다.

이런 감탄사가 들리면 난 모든 종류 김치를 시식하게 유도한다. 그럼 그들은 순순히 따라서 이쑤시개로 김치를 찍어 입에 넣고, 그때마다 같은 감탄사가 이어진다. 비단 우리 김치의 위력이 아니란 걸 안다. 이런 분들은 찐 김치 사랑꾼이다. 아마도 그들의 장 속 환경이 젖산균에 길든 게 아닌가 싶다.      


신나게 적고 보니, 우리 김치 맛이 얼마나 좋은지 자랑하는 모양새다. 물론 남편과 나는 우리 김치 맛에 자부심을 갖고 판다. 그런데 제대로 된 이국 음식점이 거의 없는 동네에서 이런 기회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큰 점수를 딸 수 있다. 여기에 갈수록 높아지는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도 한몫하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진심으로 김치를 즐기는 미국인들이다. 이건 내가 훗날 김치 장사하던 시절을 돌아보며 가장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다. 하루 12시간 넘는 노동에 지친 내 모습 말고. 새로운 맛과 경험으로 반짝 빛나는 그들의 눈빛과 말을 기억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손님 반응은 이거다.


이 동네에 한국 음식점이 없잖아요. 김치 팔아줘서 정말 고마워요!



사지 않으면 요리할 수 없고
보이지 않아 먹지 않다 보면
먹고 싶은데 참는 일도 없다
그렇게 우리 부엌에서 고기를 놓아주었다
Flexible + Vegetarian = Flexitarian
완벽하지 않다고 포기하기엔 너무 소중한 채식 이야기, <플렉시테리언 다이어리> 훑어보기


매거진의 이전글 올해의 김치 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