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런던의 웨스트엔드 뮤지컬, 그 대표작 중 하나인 맘마미아를 보기로 했다. 유명 혼성 팝그룹인 ABBA의 노래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뮤지컬을 잘 몰라도 가볍게 즐길 수 있다고 들었기에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맘마미아 대형 포스터가 떡하니 걸려있는 프린스웨일즈 극장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앞에서 네 번째 열 가운데, 명당 좌석을 학생 할인가로 구입할 수 있었다. 오후 7시 공연이었다.
공연이 시작되자 이내 홀 안은 배우들의 노래와 밴드가 직접 연주하는 악기소리로 가득 찼다. 좌석이 무대와 가까운 덕분에 배우들 얼굴 분장의 두께까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마이크 소리에 섞이지 않는 작은 숨소리까지 들렸다. 여주인공인 소피가 객석을 향해 큰소리로 대사를 외치는 씬에서는 그녀의 침이 마치 분무기처럼 공중에 뿜어졌는데, 극 중 배경인 그리스를 은유하는 파란색 조명빛과 만나니 그렇게 황홀해 보일 수 없었다. 난 ABBA와 그리 친숙한 세대는 아니었지만 생각 외로 대부분이 귀에 익은 곡이었다. 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노래를 이야기에 맞춰 들을 수 있다니. '이래서 사람들이 뮤지컬을 좋아하는구나.’ 알 것 같았다.
조금 지나자 무대 전체를 두루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무대 바로 앞 좌석 한가운데 위치한 지휘자에게 눈길이 갔다. 무대 지하에는 키보드, 드럼, 기타 등의 악기가 보였다. 지휘자가 무대 위의 배우와 그 아래에 있는 밴드를 동시에 지휘할 수 있게 돼 있었다. 덕분에 지상의 축제와 지하의 오케스트라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셈이었다. 공연 전체를 열정적으로 통치하는 그 권위자는 자신의 지휘봉으로 허공에 리드미컬한 그림을 그려나갔다. 통통통 튀는 그의 어깨만 봐도 내 어깨가 절로 따라 움직였다. 앞에 있는 키보드 건반을 자신의 이마로 쿵 찧는건지 손가락으로 누르는지 분간이 안될만큼 열성적으로 연주하기도 했다. 고조되는 열기에 나의 볼도 점점 빨갛게 상기되어갔다.
‘저 사람의 동작은 흥을 돋구기 위해 철저히 계산된 걸까, 아니면 본인이 진정 흥에 겨운걸까?' 내가 지휘자 입장이라면 어떨지 생각해봤다. 물론 이건 그의 일이자 주어진 역할이다. 그치만 어떤 일에 숙련된다는 것과 그 일을 즐긴다는 건 다른 얘기일 수 있다. 단지 지휘에 숙달되었다는 이유만으론 저렇게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힘들 것 같았다. 하루 두세 차례씩 같은 공연을 매일 반복하면 지겨울 법도 할텐데 말이다. '저 흥겨운 모습은 과연 진심에서 우러나온걸까?’ 궁금증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그를 걱정한다기보단, 사실은 본래의 내 고민에 더 가까웠다. 처음엔 즐겁다가도 조금만 지나면 초심을 잃어버리고 흐지부지 된 일들이 허다했다. 대학 새내기 시절 보드게임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보드게임을 좋아해서 선택한 일이었다. 시끌시끌한 카페에서 목청을 높여 게임을 설명하다보면 금방 목이 쉬었고, 여기저기서 룰을 물어보는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하루하루 물에 젖은 김처럼 녹초가 되었다. 결국 보드게임에 대한 흥미마저 잃고 두 달만에 일을 그만두었다. 스쿼시도 두 달, 헬스는 한 달 반, 생각해보니 다 그런식이었다. 하다못해 흥미 있던 취미조차 오래 하지 못하면서, 나중에 직장생활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 뒤로 9년을 더 살았지만 이 고민의 답을 쉽게 찾지 못했다. 처음에는 아무리 끌리고 좋아서 시작한 일이라도 계속하다보면 항상 위기의 순간이 왔다. 재미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중도의 어려움에 후퇴하기도 하며, 다른 흥미거리들이 끊임없이 유혹의 손길을 뻗쳤다. 하지만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좋아하는 뭔가를 하고자 한다면 꾸준히 지속하는게 중요하다는 것을. 내부에서 흔들리고 외부에서 흔들어도 자신을 믿고 꿋꿋이 하던 일을 해야한다는 것을. 내가 추구하는 일을 다각도에서 경험하며 좋고 싫고 나에게 맞고 안맞고를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점차 그 일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비로소 더 높은 차원의 즐거움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비바람을 여러 차례 견뎌낸 나무가 내적으로 더 단단해지듯, 흔들림을 꾸준히 이겨내야만 확신이라는 열매가 열리는게 아닐까.
최근 수영을 시작했다. 이제라도 물과 친해지고 싶었고, 무엇보다 재밌어보였기 때문이다. 타고난 맥주병인지라 초반엔 물만 잔뜩 먹었다. 재미를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그치만 여기서 멈춘다면 어릴 적 보드게임이나 스쿼시와 똑같은 꼴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꾹 참고 꾸준히 수영장을 나가다보니 어느덧 8개월 차가 되었다. 이제 수영은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물 공포증을 극복했다는 자신감의 산 증거이자 체력을 길러주는 중요한 수단이다. 무엇보다, 갈수록 재밌어진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매일 1500m 를 수영한다고 하는 것처럼, 나 또한 10년, 20년이 지나도 꾸준히 할 인생운동을 찾은 것 같다.
취미생활에서 더 나아가 <진정 좋아하는 나의 일>을 좇아 한 번 꾸준히 해보려고 한다. 묵묵히 노력이라는 벽돌을 하루하루 쌓다 보면, 마음 속에 집 한 채쯤은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순수한 즐거움으로 가득 찬,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신념의 집 말이다. 지칠 땐 그 집에서 쉬기도 하고, 좌절할 땐 위로도 받고, 더 나아갈 수 있는 힘도 받으며 살아가길 바란다. 그래서 10년 전 맘마미아 뮤지컬의 지휘자가 내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나 또한 내 일을 대하는 진심 어린 모습으로 다른 누군가의 삶에 영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