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을 타자화하는 기성세대의 엘리트주의적 시선에 대하여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들고 온 영화 '버닝'의 소재는 다름아닌 밀레니얼 세대였다. 젊은 배우, 특히 신인까지 캐스팅하고 기존에 잘 쓰지 않던 음악도 사용했으며, 미장센을 강조한 노을 장면 등에서 젊은 관객에 어필하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그러나 '불쌍한 청년'에 관한 클리셰로 가득한 영화는 청년을 지극히 기성세대의 편견으로 바라봤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청년을 고통과 분노의 세대로 규정하는 엘리트주의적 시선은 오히려 청년을 끊임없이 타자화하고 있다.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각색한 영화다. 원작의 주인공은 31살 기혼 남성이며 이야기는 헛간 태우기를 취미로 가진 정체 불명의 남자에 대한 미스터리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버닝'에서 주인공은 경기 파주 농가에 사는 희망 없는 청년 종수(유아인)로 바뀌면서, 영화는 청년에 관한 이야기로 전환한다.
종수는 유통회사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한다. 농부인 그의 아버지는 분노조절 장애로 공무원과 싸우다 상해를 입혀 징역을 살게 된다. 그런 아버지를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집을 나갔고, 종수는 아버지의 지시로 엄마의 옷을 불태웠다. 그런 그의 앞에 어린 시절 동네 친구 해미(전종서)와 벤(스티븐 연)이 나타나면서 미스터리가 시작된다. 서울 강남의 고급 빌라에 살고 포르쉐를 끄는 벤은 ‘재미’만을 추구하는 의문의 남자다. 벤이 대마초를 피우다 ‘두 달에 한 번 정도 비닐하우스 태우는 것이 취미’라 고백하고 때마침 해미가 사라져 종수는 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영화의 중심에 있는 ‘청년’의 묘사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뻔했다. 종수의 도망간 엄마는 갑자기 돌아와 돈을 빌려 달라하고, 초라한 집의 텔레비전에선 “OECD 국가 중 한국의 청년 실업률이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뉴스가 흘러나온다. 시종일관 '청년 너네 참 불쌍하다. 불쌍하다.'는 목소리가 느껴졌다.
벤의 화려한 삶을 보고 종수는 “어떻게 젊은 나이에 저렇게 돈이 많을 수 있지?”라거나 “한국엔 정체 불명의 부자인 개츠비가 너무 많다”며 은근슬쩍 불만을 표시하기도 한다. '계층 이동이 어려워진 불쌍한 세대'라는 암시일까? “야근 특근 가능하냐”는 고용주의 질문에 도망쳐버리고, 벤을 보며 박탈감을 느끼는 소설가 지망생 종수는 '희망 없는 청년’, '삼포 세대'의 전형 그 자체다.
이러한 연민의 시선은 ‘그레이트 헝거’ 비유에서 극대화됐다. 해미가 아프리카에서 배운 부시맨 춤 속에서 ‘리틀 헝거’는 음식을 먹지 못해 배가 고픈 사람이지만,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 배가 고픈 사람이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과거와 다른 이유로 요즘 청년들은 괴롭다는 시각을 보여주려 한 것일까? 하지만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는 건 기성세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 감독은 함께 시나리오 작업을 한 오정미 작가와의 대화에서 “지금 사람들은 각각의 이유로 분노하고 있고, 그 중 청년의 분노가 문제다. 한국 청년은 희망을 느끼지 못하는데, 미래도 달라질 것 같지 않다. 분노의 대상을 찾을 수 없어 더욱 무력하다. 멀쩡해 보이는 이 세상이 그들에겐 커다란 수수께끼처럼 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이 대목에서 사실 이 영화는 청년의 분노를 그린 게 아니라, 2018년에 더 이상 쫓아갈 이데올로기도 없고, 새로운 세대를 이해할 만한 섬세함도 갖추지 못한 투박한 기성세대의 답답함을 그린 쪽에 가까워 보였다.
종수도, 해미도, 벤도 관념에서 출발한 클리셰로 구성된 단편적 인물일 뿐 소설 내에서 살아있는 인물로 창조되지 못했다. 그래서 연기도 어색해보인다. 이렇게 가뜩이나 단편적 인물들로 인해 감정 이입이 어려운데, 그것을 서사로 이끌어가지도 못하고 상징과 은유로 점철해버려 미스터리와 물음표만 가득한 영화가 되버렸다.
결국 감독은 하루키 단편에 나오는 아주 간단한 미스터리를 2시간 20분짜리 영화로 늘리기 위해 청년 담론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으로 신선함을 자아내기엔 관점이 식상했다. 그래서 메타포로 점철된 이야기들은 청년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다.
이 영화에서 이창동의 휴머니즘을 찾는다면, 감독의 세대처럼 다 함께 쫓아갈 이데올로기적 파랑새도 없고 계층 이동도 어려워진 청년 세대에 대한 연민의 시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나름대로는 청년을 위로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선은 결국 청년을 타자화하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김난도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했다면 이창동은 '지금 시대의 청춘이라 무척 아프겠구나'라고 말하는 격이다.
청년에 관한 영화는 이창동이 만들 것이 아니라 청년이 만들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최소한 그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거나, 실질적 삶을 들여다보고 난 다음에 했어야지, '요즘 청년들은 불쌍할 것'이라는 나태한 가정에 의해 시작해서는 안됐다. 그러나 이창동은 그저 그의 세대의 시각에서 영화를 만든 것이고 이미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는 거장이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어느 분야든 '청년의 목소리가 없다'는 점이다. 최근 '어벤저스' 흥행을 보며 한국 드라마는 물론 한국 영화도 청년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다시 느꼈다. 어딜가든, 심지어 대중문화 업계 마저도 고루한 시각의 기성세대가 돈줄과 선택권을 쥐고 있으니 청년 취향의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은 당연히 보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새로운 의견을 내도 언제나 기성세대의 시각에 의해 각색되고 편집될테니.
그럼에도 의미있는 시도들이 조금씩 솟아오르고 있는 건 다행이다. 무엇보다 기성세대도 특히 대중문화에서 일하고 있다면, 젊은 감각을 기성세대의 시각이 아닌 그들의 시각으로 바라보려 자기 객관화를 해야할 것이다. 결국 예술도 문화도 관념이나 가정이 아니라 사람의 삶에서 시작해야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