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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 Jan 09. 2018

혐오는 언제나 멍청하고, 사랑은 늘 현명하다.

해외 드라마, 여성 주인공 전성시대

 “남성 독점의 시간은 끝났다”


  할리우드 여배우와 작가, 감독, 프로듀서 등 300명이 결성한 직장 성폭력 대응 단체 ‘타임즈 업(Time’s up·시간은 끝났다)’이 뉴욕타임스 전면 광고를 통해 한 선언이다. 배우 리즈 위더스푼이 제안해 만든 이 단체에는 나탈리 포트먼, 오프라 윈프리, 메릴 스트립 등이 참여했다. 


  페미니즘 바람이 거세다. 지난해부터 할리우드, 실리콘밸리의 직장 내 성폭력을 폭로하는 발언이 이어지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성차별적 발언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제작자들은 이를 예견이라도 한 듯 여성을 중심에 내세운 콘텐츠를 내놓고 있다.


**스포일러 주의**아래 내용은 닥터 후 2017년 크리스마스 스페셜 에피소드와 넷플릭스 '블랙 미러' 시즌 4의 일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반전이나 결말은 노출하지 않았으나 에피소드의 배경과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2018년 하반기 모습을 드러낼 예정인 '닥터 후' 13대 닥터 조디 휘터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SF 드라마인 BBC ‘닥터 후’는 지난해 크리스마스 스페셜 에피소드에서 54년 만에 여성 닥터를 깜짝 공개했다. 570만 명이 시청한 이 에피소드에서 12대 ‘닥터’ 피터 카팔디의 몸이 재생성을 위해 사라지자 13대 닥터 조디 휘터커가 등장한 것. 1963년 방영을 시작한 ‘닥터 후’에 나온 첫 여성 닥터다. 새로 태어난 그는 “오, 멋진데?”라며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닥터 후’ 시즌11의 제작자 크리스 칩널은 “오래전부터 13대 닥터는 여성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고 오랜 토론과 오디션을 거쳐 최고의 닥터를 선보이게 됐다”고 했다. 휘터커는 “페미니스트, 여성, 배우이자 인간으로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게 돼 말할 수 없이 기쁘다”고 밝혔다.


  여성 닥터의 등장에 오랜 팬들 사이에서는 닥터 고유의 매력이 사라질까 걱정된다는 불만이 나오기도 한다. '정치적 이유를 위해 성별을 바꾸는 것은 말이 안된다'거나 '메리 포핀스도 남자 주인공으로 바꿔라'는 식이다. 혹자는 고스트 버스터즈의 망한 리메이크 버전을 예로 들기도 했다. 


  '닥터 후'는 물론 '이스트 엔더스'처럼 한 드라마를 수십 년 동안 보고 또 보는 영국인들. 변화를 반기지 않는 그들에게 어울리는 반응이다. 하지만 6대 닥터 콜린 베이커는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닥터가 가진 여성적 측면을 보여주기로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며 환영했다. 결국 새 닥터의 승패도 여기에 달려있다. 단순히 '여자 주인공'을 새로운 흥밋거리로 앞세우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보여주지 못했던 닥터의 여성성을 통해 색다른 서사를 이끌어 내야만 할 것이다.


무자비한 살상 로봇과 혈투를 벌이는 '블랙미러' '메탈헤드'의 주인공 벨라
"미리 생각하지 않고도 모든 스토리의 주인공이 여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훌륭한 일"


  이런 서사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걸 지난달 29일 공개된 넷플릭스 '블랙 미러' 시즌 4가 보여줬다. 이번 시즌 모든 6개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여성이다. ‘블랙 미러’는 2011년 영국 채널4에서 시작한 단편 드라마 시리즈.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발달에 따른 암울한 미래를 적나라하게 그려 주목받은 뒤 지난해부터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제작되고 있다.


  ‘블랙 미러’가 공개되자마자 모든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사실이 화제가 됐다. 그러자 제작자 애너벨 존스는 "미리 설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공교롭게도 모두 강한 캐릭터를 지닌 여성이 전면에 나서게 됐다"며 성별의 선택은 우연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미리 생각하지 않고도 모든 스토리의 주인공이 여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훌륭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어떤 드라마에서는 남성이 모두 주인공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여성이 모두 주인공인 드라마도 지극히 자연스럽게 생겨나야만 하는 일이다. 


 ‘블랙 미러’의 새 시즌은 여성이 가진 감정과 에너지가 이야기에서 신선하게 드러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살인을 하게 되는 에피소드 ‘악어’의 주인공은 처음에는 남성이었다. 하지만 오디션 과정에서 여성 배우가 주연을 맡음으로써 메시지가 더 강력해졌다고 존스는 설명했다. 작은 체구의 미아 놀란이 침착하게 범행을 저지르는 모습은 의외성을 발휘하며 섬뜩함을 자아낸다. 사실 그녀를 스테레오 타입으로 본다면 피해자의 이미지에 가깝다. 미아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 상황을 긴장하며 지켜보던 시청자는 곧바로 반전을 맞게 된다.


조디 포스터가 연출한 어둡고 암울한 영웅 서사 '아크엔젤' 


  조디 포스터가 연출한 ‘아크엔젤’도 여성이 중심에 서자 풍부해진 서사가 돋보인다. 이 에피소드는 자녀의 몸에 칩을 심어 감정과 시각을 관찰하는 프로그램인 아크엔젤이 개발된 미래가 배경이다. 아크엔젤을 중심으로 한 엄마의 집착과 딸의 저항을 오이디푸스 신화로 비틀어내고 있다.


  오이디푸스 서사는 아버지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홀로 서야 하는 영웅의 운명이자 자아를 위한 교훈으로 읽히곤 한다. 이 서사에 모녀관계가 대입되자 비뚤어진 모성애와 욕망이 뒤얽힌 불편하고 어두운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블록버스터에 비판적이었던 조디 포스터, 결국 지독히도 어두운 영웅 서사를 보여주면서 '이렇게도 할 수 있다'고 과감하게 외치는 듯하다. 


  국내에서도 KBS2 ‘마녀의 법정’, ‘고백 부부’처럼 여성의 출세욕, 모녀 관계를 신선하게 그린 드라마들이 주목받았다.


  올해에도 이런 흐름은 이어질까? 12대 닥터 카팔디는 새 닥터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혐오는 언제나 멍청하고, 사랑은 늘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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