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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 May 26. 2018

과도한 메타포가 때로는 무책임하다

대중을 기만하는 예술성과 순수라는 허위에 대해

누벨바그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 ‘누벨바그’로 불리는 프랑스 고전 영화들을 일부러 찾아본 때가 있다. 

 

  그 무렵 나는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에서 시작해 소설인 알베르 카뮈 ‘이방인’,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거쳐 프랑스 고전 영화에 환상을 품고 있었다. 고다르의 ‘네멋대로 해라’와 ‘미치광이 피에로’의 아름다운 배우들, 고전적이면서도 스타일리쉬해보이는 화면, 감정 이입이라고는 허락하지 않는 무맥락의 서사가 나에겐 오히려 신비로움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잘 몰라도, 언젠가는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은 순수나 예술성이 숨겨져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환상에서 깨어나게된 건,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를 보고 나서다.  


  ‘대부’는 무척 길었지만 보는 내내 몰입했고 감탄했다. 탄탄한 서사와 생생한 캐릭터를 갖춘 영화적 문법으로 고전 문학만큼이나 인간을 깊이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유적 장면이 등장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들의 언어를 벗어나지 않아 의미가 확실했다. 

  영화는 말하려고 하는 바를 단정적으로 말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꽁꽁 숨겨 놓지도 않았다. 그 의미는 인물과 사건의 묘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꽤 명확하게 드러났다. 잘 짜여진 이야기와 인간에 대한 깊은 관찰을 통해 구축한 캐릭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를 소설에서 천재적이고 탁월하게 해낸 것이 도스토예프스키다. 그의 소설 속엔 현실 같은 세계가 창조되고 그 속에 인물들이 살아 숨쉰다. 지인과 “도스토예프스키는 어쩌면 사람을 죽여봤을지도 모른다”는 얘길 한적도 있다. 때로는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소름끼치는 인간과 삶에 관한 날카로운 시선 때문이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메타포가 열어주는 환상과 그 함정

 

  지난주 ‘버닝’에 대한 글을 쓰고 나니 몇몇 분들이 개인적으로 말을 걸어왔다. 나와 다른 관점에서 영화를 의미있게 본 의견들이었다. 다른 관점은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해주기에 귀한 기회다. 그것도 감정적 반응이 아닌 차분하게 글로 정리된 의견들이어서 다른 관점을 깊이 생각해보는 소중한 시간을 마련해줬다. 

 

  생각을 정리해보면, 버닝의 큰 매력 요소 중 하나는 ‘은유’였던 것 같다. 감독이 수수께끼처럼 여기저기 심어 놓은 메타포들은 해석의 여지를 자유롭게 열어 주는 관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실마리를 엮어 자기만의 의미있는 결론을 도출해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버닝을 보며 코폴라와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누벨바그를 다시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누벨바그는 인과관계나 구조적 서사, 캐릭터의 의도적 파괴로 의미를 획득한다. 작품 그 자체보다, 무언가의 반대급부로서 의미를 생성하는 것이다. 즉 헐리웃으로 대표되는 미국식 서사에 대한 반발로 누벨바그는 생명력을 얻는다.

  문제는 그것이 이야기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서사나 캐릭터에 대한 무분별한 해체로 이어져 살아있는 사람들의 일상과 삶에서 조차 멀어져 버린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농담처럼 했던 ‘프랑스 영화는 재미없다’는 말은 사실 영화로서 가치가 없다는 대중의 냉정한 평가다. 하지만 우연히도 한국의 몇몇 영화와 문학 작품이 이런 전략을 채택했고, 일부 영화는 그 결과 칸의 주목을 받았다. 대표적인 것이 홍상수다.  


  ‘버닝’ 역시 간단한 서사 위에 은유를 덕지덕지 붙여 그 서사를 뭉개고 낯설게 만들고 있었다. 그의 영화에 익숙한 사람은 이해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겐 결말조차 모호하다. 감독은 이 간극을 이용해 마니아와 대중을 가르고, 예술성과 대중성을 가른다. 여기서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현실과는 전혀 상관 없는 관념이 생성되고, 인간을 직관하는 날카로운 관점이나 따스한 애정이 아니라 인간을 구별짓는 엘리트주의가 피어난다. 


홍상수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


 대중에 대한 경멸이 순수는 아니다


  지난번 글에서는 ‘버닝'의 청년에 관한 관점을 중심으로 다뤘지만 실은 이창동 영화에 대해 늘 유보적 시선을 갖고 있었던 것이 이런 이유였다. 은유나 상징은 이야기꾼에게 가장 쉽고 나태한 전략이다. 진부하고 식상한 메시지나 서사에 은유를 더하면 미스터리와 신비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 미스터리 뒤에는 마치 예술성이 숨겨진 듯한 착각이 든다. 창작자는 가만히 있어도 이리 저리 요리해주고 의미 부여해주는 비평가들에 의해 순수와 예술의 화신이 된다. 그러나 냉정히 헤쳐보면 그 안엔 아무 것도 없다.

  진의는 모호한 말 뒤로 숨겨지고, 매니아들은 감독의 입만 바라보며 정답을 구하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다. 그럼에도 창작자는 서스럼없이, 혹은 무책임하게 말한다. “이야기가 스스로 의미를 찾아가기를 원했다”고. 


  인간을 그리는 예술의 기본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와 상징, 서사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물론 그 간극을 고무줄처럼 조절하고 상상의 여지를 열어주는 것은 너무나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 사이의 연결 고리를 의도적으로 끊어가며 대중과 차단하고 구별짓기 하는 것을 순수나 예술이라 보고 싶지 않다.

  일부 예술가들은 ‘대중성’을 경멸하지만 대중성 속에 들어 있는 '보편성'은 예술가가 갖춰야 할 소통의 기본 덕목이다. 한국에서도 일상을 이야기하며 삶에 관한 통찰을 보여주는 것을 이미 소설가 박완서가 훌륭하게 해내고 있지 않았는가. 


  또 하나 생각해봐야 할 것은, 창작자가 자의적 상징과 은유로 점철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쉽느냐, 아니면 탄탄한 서사를 설계하고 인물을 창조하는 게 쉽느냐는 점이다. 실은 후자가 더 어렵고 공이 든다.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자신이 하는 이야기에 책임을 지는 것도 후자다.  

  예술가는 사회와 동떨어져 선문답을 하는 신선이 아니다. 예술가가 사람들이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려주길 기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또한 어디까지나 사회 속에서 울림을 가져야 의미있는 일이다.


소설가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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