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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Jul 19. 2021

"자해하는 사람"의 정체성

죽고싶은 건 아니지만... 자해를 하는 사람의 마음



자해가 무엇이며, 

어떤 행동이 자해에 해당하는가 


심리학자간 이견이 있었고, 일종의 합의에 다다른 건 오래지 않았습니다.

80-90년대 초기 심리학자들은 자해를 포괄적으로 정의하고, 대개 이런 행동들이 자해라고 말했습니다.


장기적으로 자신을 해칠 걸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 


이것에는 지속한다면 분명한 위험이 예상되는 난폭운전, 폭음과 폭식, 꼭 챙겨야만 하는 약을 의도적으로 복용하지 않는 것, 나아가서 해가 되는 관계에 매달리는 것까지 폭넓은 행동이 포함됩니다. 

이 관점의 포인트는 스스로를 해하려는 '자기파괴적인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자해에 의해 파생되는 악영향 등 심각성에 있어서, 관계에 과도하게 매달리는 등의 간접적인 자기파괴 행동과 신체에 직접적인 상해/손상을 입히는 자해행동 사이의 차이가 커서 이 개념을 더 이상 자주 사용하지 않지만, 스스로에 대한 파괴욕구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김영하 작가의 책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도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한편 오늘날 가장 널리 사용되는 자해행동의 기준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자해를 할 때 자살, 즉 '죽으려는 의도가 없을 것' 

2. 직접적인 자해로서 '신체에 상해를 가하는 행동' 

3. 사회적으로 용인하지 않는 행동 


첫 번째와 두 번째는 yes or no 이기 때문에 명쾌한 편입니다. 반면 3번은 다소 모호한 구석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전문가 간에 의견이 갈리는데, 3번 기준을 따르면 타투나 피어싱처럼 악세서리로 이해되는 자발적인 상해는 자해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허점을 짚는 사람들은 그 유형이 비교적 사회적으로 용인되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대인관계나 진로 개발, 직업 활동 등을 가로막을 정도로 '과도하게,' 특히 스트레스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문신을 더 하거나 몸에 피어싱을 뚫는 경우에는 일종의 '자해성'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견해를 내놓기도 합니다. 


80-90년대에 비해 자해를 판별하는 기준에서 주관성(즉, 자해하는 사람의 의도)이 옅어졌지만, 여전히 한 사람의 상황을 판단할 때는 특정한 행동에 기저하는 심리와 의도, 감정상태가 어떤지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앞선 글에서 자해는 분명한 고통을 초래하고 극단적인 성격의 행동이지만, 그에 비해 결코 드물지 않다고 소개했습니다. 한국 청소년과 대학생 연령대 젊은 성인 20% 가량이 한번 이상 자해를 해본 경험을 보고합니다. 10명 중 두 명 이상, 다섯만 모여도 그 중 한 명에게 자해 경험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온라인에서 이 비율은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자해가 다른 심리질환과 그 증상에 비해 더 터부시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쉽게 비난 받거나 자해 습관과 결부해서 낙인(stigma)이 찍힐 위험이 있기 때문에 실생활에서는 자해 사실을 숨기지만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비교적 더 개방된 성격의 인스타그램은 물론이고, 폐쇄성 있는 트위터 SNS에서 자신의 자해행동을 중심으로 온라인 활동을 하는 걸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자해러 

자해하는 사람의 정체성 



가상 인물 A의 사례입니다.


열 여섯 살 A는 집안에서 도무지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부모님은 하루가 멀다 하고 다투셨고, 부부싸움 뒤엔 늘 A를 향한 비난어린 잔소리가 쏟아졌습니다. 부모님이 기분 좋을 땐 문제가 되지 않았던 A의 방 정리 상태, 성적 등이 부부싸움을 하신 뒤에는 천하에 둘도 없을 불효가 되어서 한 시간도 더 넘게 무릎을 꿇고 앉아 일방적인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날 저녁에는 식사도 제대로 챙겨주시지 않았고, 예민한 부모님의 이목을 끌지 않기 위해 화장실을 가는 발걸음마저 조심스러웠습니다. 

A의 자해가 처음 시작된 건 학교에서 친구와 언쟁을 한 날이었습니다. A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친구는 A를 몰아세우며 마구 짜증을 냈고, 위축된 A의 말 꼬리를 잡고 늘어지며 심지어 주변 다른 친구들에게까지 동조를 구하면서 A를 탓했습니다. 속이 썩을 대로 썩은 A가 귀가했을 때, 하필 그날마저도 부모님 사이의 분위기는 냉랭했습니다. A는 방으로 들어와 문을 걸어 잠그고 컴퓨터 게임을 하면서 생각을 지워내려고 했지만 그날 따라 참을 수 없는 극심한 울화가 치밀었습니다. 일부러 더 세게 키보드를 두드려봐도 뜨거운 불에 데인 듯한 감정이 진정되지 않자, A는 연필꽂이에 꽂혀있던 볼펜을 가지고 자신의 허벅지를 악 소리가 나오게 찔렀습니다. 평소라면 그 아픔에 화들짝 놀라서 그만뒀을 텐데 다리에 전해지는 날카로운 고통에 화가 나는 생각들에 몰려있던 주의가 흩어지면서 다리로 체온이 몰리고 머리는 시원해지는 경험을 합니다

A에게 정당하지 않은 짜증을 부린 친구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던 충동, 사실 내 잘못도 아닌데 화풀이로 잔소리를 쏟아내던 부모님에게 그만 좀 하시라고 소리를 치고 싶었던 쌓인 울화가 조금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자해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가장 만연한 오해가 이런 것입니다.


비행청소년일 것이다.
성격문제, 분노조절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남을 위협하려고, 또는 주변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자해와 관련한 연구를 먼저 시작한 국외의 학자들은 이런 오해에 대해서 

Myths about self-injury

라고 표현합니다. 근거는 없지만 자해하는 사람에 대해 사회관습적으로 이어져 온 편견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A의 실상과 같이, 실제로 자해하는 사람들이 내적으로 겪는 경험은 사회적인 오해와 동떨어진 경우가 많습니다.


A는 원래부터 성격문제가 있던 아이도 아니었고, 비행청소년이기는 커녕 친구가 부당한 짜증을 내도 참아내며 응수하지 않을 정도로 참을성 깊고, 오히려 내성적인 편입니다. 강렬한 충돌과 냉전을 반복하는 부모로 인해 가정 내에 의지할 사람이 없어서 누군가 믿을만한 어른이나 친구에게 마음을 터놓고 도움을 구하고 싶지만, A의 응석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라면서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걸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홀로 끙끙 앓는 모습입니다. 뿌리가 깊은 가정문제와 그로 인한 '정서(표현 및) 조절의 어려움'이 친구와의 마찰이라는 부가적인 요인을 만나 임계점 이상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일으켰을 때 자해를 하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A의 자해 경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A가 스스로 선택한 게 아닌데도 불안정한 가정에서 성장함으로써 A에게 주어진 자해-위험요소들이 있습니다.

가정 내 냉담하고 적대적인 분위기, 불안정한 부모의 양육태도가 해당됩니다. 

A가 위험요소를 가진 채 성장하면서 추가로 얻게 되는 위험요소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다툰 날이면 화장실마저 숨 죽여 이용해야 할 정도로 극도의 긴장상태가 되고, 보통 아이처럼 부모님에게 투정을 부린다거나 위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주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억압해온 A의 감정조절 방식이 그것입니다. 

어릴 적부터 냉담하고 비난하는 부모의 메시지를 들어온 A는 자기 스스로에 대해 부정적인 상(이미지)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도 큽니다. "나는 귀찮은 존재", "나는 모자라고 능력이 없어" 같은 인식은 학교생활, 특히 또래와의 관계에서 당당해지기 어렵고,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이게끔 A의 자존감 형성을 방해했을 것입니다.

견딜 수 있는 한계 이상으로 솟구친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다급하게 도망치기 위해 처음 자해를 경험하게 되면 "하나의 사건"으로 일단락하기 어려운 여러 복합적인 작용이 따라오게 됩니다.


A도 자해가 극단적이고 위험한 행동이라는 걸 느끼고 있지만, 

자해를 해서 그동안 다른 어느 방법으로 잠재울 수 없었던 극심하게 고통스러운 감정이 잠시 해소되었다는 게 시사하는 의미가 대단하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A에게 부모님처럼 내가 갈급하게 도움을 구한다고 해도 차갑게 돌아설 것같은 남에게 부탁하지 않아도, 나 스스로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 감정조절 수단이 생겼다는 의미이고, 동시에 나는 자해처럼 극단적이고 위험한 방식이 아니면 스스로를 다스릴 수 없는 나약한 사람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할 수 있다" 와 "할 수 없다"의 양립할 수 없는 양 축 사이에서, A는 한 쪽으로는 심한 스트레스 상황에 처할 때마다

 

자해를 하면 좀 나아질텐데...

하는 강렬한 충동을 경험하게 되고, 그로써 자해를 한다면 


나는 극단적이고 위험한, 떳떳하지 않은 자해하는 사람 

이라는 정체성이 공고화되면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연구자들은 자해하는 사람이 Stigmatized identity, 즉 낙인 찍힌 정체성을 갖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특히 여러번 자해를 한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남들이 자해하는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고, 함부로 말하곤 하는 오해와 편견과 연합하여 형성이 됩니다. 어떤 고충 때문에 자해를 하게 된 건지 잘 알지 못하면서 문제 많은 사람으로 쉽게 귀결 짓곤 하는 사회적 낙인이 자해하는 당사자의 수치심을 자극하고, '이런 사실은 손가락질 받는 일이니까 숨겨야지'라고 여기게 만드는 것이죠. 


마음 건강을 잃게 되면 사람들은 타인과의 교류를 차단하고 고립되어 침전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집중과 정성을 요하는 '대인관계'를 할 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혼자 땅을 파는 시간이 길수록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을 발견하는 게 더 어려워집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해오던 습관대로 고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현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특히나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상태라면 시야가 좁아지기 십상입니다. 다른 예로, 우울한 사람에게 기분전환이 될 수 있는 짧은 산책, 가벼운 운동같은 방안을 제안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자해하는 사람도 유사한 길을 걷게 됩니다. 


중요한 대상(A의 경우 부모)으로부터 들어 온 탓하는 말들과 자해하는 사람에 대해서 접한 남들의 편견어린 메시지로 인해서 자해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숨기고, 남과 거의 교류하지 않거나 '괜찮은 나'를 꾸며내어 관계를 맺습니다


타인 앞에서 진짜 나를 보일 수 없는 고통은 상당합니다. 


이런 취약점이 위험한 상대(대표적으로 자해하는 사람에게 무조건적인 애정을 약속하지만, 이면에는 착취적인 의도를 가진 사람)와 관계에 연루될 위험을 높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다양하고 건강한 감정조절 방법을 익힐 기회를 가로막게 됩니다. 괴로울 때 자해를 하면 부정적인 감정을 잠재울 수 있는데...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다른 방법을 배우려고 시도하기 두려운 마음도 존재합니다. 



이처럼 자해는 뿌리가 깊고, 

개인의 행동이지만 동시에 관계의 문제이며, 사회관습적인 각종 편견 오해와도 연관되어 있어서 

넘겨짚지 않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아려야 할 속이 천리입니다.



여기까지는 자해가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성격 또는 남의 관심을 끌기 위한 저의 때문이 아니라, 복잡하고 괴로운 심경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었다면 충분합니다. 

이어지는 편에서는 감정보다 생각에 집중해서, 자해하는 사람이 가진 사고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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