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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Jul 22. 2021

어째서 자해인가요

죽고싶은 건 아니지만... 자해를 하는 사람의 생각



"굳이 꼭 그래야만 해?"

남의 말은 쉽지만, 답하기는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왜 자해를 해야 하는 거야? 다른 방법도 많은데...

자해 경험이 없는 사람이 무심결에 할 수 있는 간편한 질문이지만, 자해하는 사람이 답하기엔 곤란한 것이죠. 


생각해보면 이런 성격의 질문에 답하기 어려운 건 비단 자해하는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친구에게 연애고민을 털어놨을 때도 그렇고, 대학진학 상담을 할 때도 비슷하게 작용하리라는 걸 예상할 수 있습니다.


왜 꼭 걔를 만나야 해? 너를 이렇게 속상하게 하는데도?
왜 꼭 그 대학에 가려고 해? 눈을 낮추면 더 수월하게 지망할 수 있는 다른 옵션도 있잖아?


대상과 맥락은 다르지만 공통된 건 이 질문이 몰이해적이라는 점입니다.

질문을 들으면 말문이 턱 막힌다는 게 그렇습니다. 여러 이유를 대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동시에 힘이 쭉 빠져버리는 경험을 합니다. 애를 들여서 대화를 해도 이해받기 어려울 거라는 직감이 들면서 이내 빨리 대화를 관두거나 어서 주제를 전환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요.


기억하는 한 심리학은 언제나 논리와 감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해왔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내면은 우주만물의 진리 규칙만큼이나 수적으로 정의하기 어렵고, 특히 우리 감정은 '느낌적인 느낌'이라는 표현처럼 명확히 정의 내릴 수 없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유사과학(Pseudoscience)이라는 오명에 시달렸고요. 


그래서 한 켠에서는 정량화할 수 있는 양적(quantitative) 연구가 주를 이뤘고, 통계적인 분석방법을 통해 연구결과가 가설에 '맞는지 틀린지' 구별하기 위한 수적인 기준들이 세워졌고, 다른 한 켠에서는 복잡다난하고 오묘한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있는 그대로, 가능한 구체적으로' 알기 위한 질적(qualitative) 연구가 수행됐습니다. 일반적인 언어로 말하면, 한 켠에서는 열렬히 객관성을 쫒았고, 동시에 주관성을 잃지 않기 위해 이중고를 겪어내며 성장한 것이 오늘날의 심리과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무심한 질문으로 돌아가서, 

심리에서 기인한 고충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왜 굳이 그래야 하는 건데?" 라고 묻는 건 1차적으로 기분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선택하는 수많은 것들 중, 

정녕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이 몇 가지나 되었던가요?


다른 선택지, 자해하는 사람도 객관적인 편에 서서 바라보면 더 '나은' 선택지가 있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상황에 이르게 된 무시하지 못할 주관성이 존재합니다. 심리상담에서는 이것을 내담자의 "주관적 세계 / 주관적인 진실"이라고 부르고, 상담자와 내담자 사이에 충분한 신뢰가 쌓여서 다양한 각도에서 내담자의 고충에 대해 말하고, 필요에 따라 논박할만큼 관계가 안정화되기 전까지는 내담자의 주관적 진실을 의심하는 건 금물입니다. 이 기본 규칙이 잘 지켜졌는지, 무심코 실수를 저질렀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사실 알아보러 나서기 전에 이미 드러나게 되는데,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내담자라면 더이상 상담소를 찾지 않을 겁니다.






어째서 자해인가요? 


운이 좋게도 이렇게 '글'이라는 수단을 이용해서, 주관성을 유지하되 객관성을 곁들여 자해를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대략 어떠하더라는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한 사람의 사정은 오직 그 사람만이 실제로 알 수 있고, 나머지는 모두 편집된 일부라는 걸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아무리 명성이 난 "대 상담자"라도 그가 내담자의 삶에 대해 대리해서 말해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이 편을 쓰는 건, 글을 읽는 분이 자해를 하고 있거나, 과거에 했던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자해를 해야만 하겠다는 거부할 수 없는 충동이 들 때, 이면에 자기 자신과 관련해서 어떤 보다 원천적인 사고와 신념(belief)이 자리하고 있었을지 - 하나의 생각해볼 거리를 제안한다는 면에서 의의를 뒀습니다. 글을 읽는 분이 자해하는 가족, 지인, 연인을 둔 분이라면 당사자의 마음세계를 일면 이해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가상인물 B의 사례입니다.

(자해하는 사람의 '심정(감정)'에 초점을 맞춘 사례를 보고싶다면)


B는 예술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선택을 앞두고 부모님은 예고 진학을 맹렬히 반대하셨지만, 하고자하는 꿈 만큼은 굽힐 수 없다는 생각에 부모님과 여러번 다투면서까지 목표를 따라왔습니다. 성공하려면 노력보다 '재능'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예술계에서, B는 향후 대학 진학과 진로를 찾는 여정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위해 온 힘을 다했습니다. 고1 때부터 수험생에 버금가는 연습량을 소화했고, 헤이해지지 않기 위해서 친구들과 과도하게 가까워지는 것도 자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청소년 대회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어야 대학 진학 때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기 때문에 동료이기도 했지만 경쟁자로 생각하니 마음을 열기 어려운 탓도 있었습니다. 늘 월 단위, 하루 단위 계획을 세웠고, 빼곡한 일정 계획에 맞춰 생활했지만 이따금 컨디션 난조를 겪어서 계획대로 연습량을 채우지 못하면 엄청난 불안감이 밀려왔습니다.

오늘을 시작으로 패이스가 무너져버리면 어쩌지? 사실 '진짜로' 최선을 다했으면 몸의 컨디션과 상관 없이 연습량을 채울 수 있지 않았을까? 내 정신력이 원래 남보다 더 약한 편인가? ...

잔혹하게 이어지는 자기비난적인 생각 끝에 B는 새로운 수단을 택했습니다. 연습량을 채우지 못하면 나 자신을 벌주어야 겠다. 잠에 들기 전에 목표 대비 연습량을 점검하면서, 조금이라도 모자랐던 날에는 쇠 자로 팔뚝을 열대씩 때리기로 했습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정신머리가 풀어지지 않고 경각심을 느끼면서, 내일은 기필코, 진짜로 최선을 다해서 해낼 따끔한 경고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효과는 확실히 있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컨디션 난조로 연습량을 다 채우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번에는 더 심한 불안감, 그 이상의 자기혐오감이 밀려왔습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려?' B는 화가 났고, 이런 식으로 하면 아무 대학도 가지 못하고 꿈을 이루지 못한 실패자가 되어버릴 것 같은 상상이 도돌이표를 찍었습니다. B는 헤이하게 게으름을 피운 자기 자신을 벌주는 매를 스무 대로 늘렸습니다. 한 해가 다 가기 전에 매는 여러 번 더 늘었고, 쇠 자로 내려치는 고통 정도로는 자신에게 충분한 처벌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르자 B는 더 강력한 새로운 방법들을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자해하는 사람에 대해 사회적으로 만연하지만 대체로 거짓된 편견 중에는 

"자해하는 사람은 공격적이고 위험하다"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망상, 환청 및 환각을 동반하는 정신증 등 기타 심리질환을 앓고 있지 않은 한국 청소년과 대학생 연령대 젊은 성인 중 약 20%가 한번 이상 자해한 경험이 있고, 이들의 공격성은 타인을 향한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 즉 내부로 향하는 특성을 보입니다. 스트레스를 받고 감정적으로 힘이 들어서 남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해치는 방법인 자해를 하는 것입니다.


사례 속 B가 자해를 하게끔 한 가장 표면적인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자해로 나 자신을 벌준다.


그리고 핵심적으로 작용했을 더 먼 이면으로 들어가면 가령 이런 생각들이 발견됩니다.


나는 자해하는 정도의 처벌은 있어야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있어.

혼쭐이 나지 않으면 반복해서 연습량을 어기는 나는 근본이 게으른 사람이야.

나는 원래 틈만 나면 요령을 피우려고 하는 게으르고 나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처벌로서 자해를 하지 않고서는 정신머리를 똑바로 차리기 어려워.



그리고 이런 생각들은 B가 날 때부터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 원천을 찾으려면 더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회귀해봐야 할 것입니다. 


'자기(self)'에 대한 생각들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새롭고 고차원적인 경험을 하면서 일부 수정이 되기도 하지만(예컨대 늘 자신은 겁이 많은 편이라고 여기던 사람이 해외여행을 통해 새롭고 흥미로운 지평을 접하고 나서 관점이 바뀌기도 하는 것처럼), 기저에 가장 두터운 층을 차지하는 핵심신념은 좀처럼 잘 바뀌지 않는 고정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긍정적이고, 스스로에 대해 너그러운 자기-핵심신념을 가진 사람은 대외적으로 당당하고, 웬만한 스트레스에는 크게 좌절하지 않는 자신감을 보이지만, B처럼 "나는 기본적으로 게으르고 나약한 사람"이라는 핵심신념을 가지면 매사에 긴장 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목표로하는 꿈을 향해서 동년배 누구보다 더 큰 열의를 가지고 자기개발을 하는 B의 표면적인 모습과 상반된, 작고 연약한 내면이 아주 작은 실패 신호에도 두려워하며 떠는 모습입니다. 



진짜 너대로 행동 해


여기서 "진짜 나"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1분 1초를 아껴서 철저한 자기관리를 해내며 목표를 쫒는 B의 외면일까요, 아니면 하루 계획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자신에게 경고를 때리는 자해를 하지 않으면 자기 힘과 의지를 믿지 못하는 내면일까요?


구태의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정말 믿는대로 보고, 생각하는대로 느끼게 됩니다.

낯선 도전이 주어졌을 때, "재밌겠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망칠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감정 경험은 극명하게 다릅니다. 전자가 스릴과 설렘을 느낀다면 후자는 공포심을 느끼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특기할만한 점은 <우울 편>에서 강조한 것처럼, 생각에도 습관이 든다는 것입니다. 

B가 어느 계기를 통해서 자해를 멈추더라도, 대학에 진학해서 더 향후를 위한 진로 선택을 앞둘 때 다시금 자신이 헤이하다는 불안감이 들면 수면 아래로 모습을 숨겼던 자해가 다시 부상하는 '재발' 현상이 자해가 가진 하나의 특성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해하는 사람의 더 건강한 변화를 위하여 전문가가 효과적으로 개입하기 위해서는 자해하는 한 사람의 특별한 주관적 세계와 진실에 대한 가능한 최대한의 이해를 바탕으로 자해 행위와 감정, 그리고 생각에 동시에 개입하는 고도의 접근법이 요구됩니다.

가장 먼저 직접적으로 안전을 위협하는 자해를 '일시 중단'하고, 스트레스를 겪으면 매우 격렬하게 치솟는 감정을 '전보다 더 길게 견디고' 자해가 아닌 다른 정서조절 전략을 익히면서,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 타인, 세상에 대해서 가진 두려운 생각들을 조명합니다.



가상의 사례로 든 B의 생각들은 예일 뿐 자해하는 다른 사람까지 대변할 수는 없다는 걸 다시금 강조하면서, 다음 편에서는 처음 자해를 한 후에 또다시 자해를 하게 되는 반복 과정에 초점을 맞춰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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