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싶은 건 아니지만... 자해를 반복하는 사정
전편을 통해 남들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자해하는 사람의 고충에 대해 사례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힘들면 부모님과 상의 해봐
친구들과 문제가 있으면 선생님께 도움을 구해봐
그래도 정 안되면 심리상담 한번 받아봐
다른 여러 대안이 시도해볼만한 가치가 없게 느껴질 때
자해함으로써 겨우 격렬한 부정정서에서 해방되어본 사람은 다시금 자해로 향하게 됩니다.
실험적인 성격의 자해를 딱 한 번 하고, 다시는 하지 않는다면 심리학에서 이것을
Episodic self-injury, 즉 삽화성 자해라고 말합니다.
가령 살아가는 게 막막하고 극심히 절망적인 심정에 휩싸여서 과거에 인터넷에서 봤던대로 자해를 한번 해봤지만, 아프기만 하고 별다른 효과가 없어서 다시는 하지 않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기억에서 희미해졌다고 해도) 심한 스트레스와 좌절감으로 인해 주먹으로 벽을 쳤다든가, 잘못을 저지르고 스스로 원망스러운 마음에 자기 뺨을 때려본 경험이 생각보다 드물지 않습니다.
심리학 연구들은 일관되게 자해에 '반복되는 특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개인의 기질과 처한 환경, 어떤 주변인이 곁에 있느냐에 따라 무수히 여러 번 반복되기도 하고, 일정 기간 반복되다가 중단하게 될 수도 있지만 대개 삽회성 자해가 아니라면 두 번 이상 자해를 한다는 겁니다.
나아가서, 자해의 반복성은 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가름 짓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보통 연구에서는 "자해 빈도(frequency)"로 명칭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에서는 "반복 횟수"로 표현하겠습니다.)
예상 가능하듯이, 반복 횟수가 많을수록 더 심각한 자해를 하고 있다고 이해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자해를 여러번 할수록 더 다양한 자해 방법을 익히는 경향이 있고, 종래에는 더 치명적인 자해를 시도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전편의 사례처럼, 처음에는 강도 1의 자해를 이용하면 감당하기 어려운 불안이 일시적으로 내려가고, 자기 자신을 벌주려는 마음도 해소되었었는데, 자해를 여러 번 반복하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강도 1 정도로는 '통하지 않는' 느낌을 겪게 됩니다.
이런 경향에는 일반적으로 어떤 강박적인 의식이나 행동이 가지는 습관화(habituation) 영향도 있습니다.
과식을 반복할수록 위가 점점 더 늘어서, 웬만한 식사로는 이전처럼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느끼기 어려운 것처럼 자해도 유사한 흐름을 따르게 되는 것이지요.
**이 편과 다음 편을 읽으실 때는 특히 평소에 가지고 있던 자해하는 청년에 대한 편견에 맞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익히지 않도록 유의하시기를 당부하면서, 자해 반복에 관여하는 특수한 '관계 요인'을 소개해보겠습니다.
이것은 응용심리학자들이 자해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할 때 가졌던 가장 초기 질문이었습니다.
유전적인 소인,
아동기 불안정한 양육환경과 심리적 외상(트라우마) 경험,
기타 사전에 가지고 있던 심리질환과 자해를 더욱 촉발하는 스트레스 사건 등등
여러 자해 시작 요인이 밝혀졌고, 자연스럽게 이어진 그 다음 질문은 ...
이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가장 많은 자해하는 청소년과 젊은 성인이 제1순위로 밝힌 이유는
자해행위가 결코 건강하지 않은 방법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같이 불완전한 사람은 버텨낼 수 없을 고통이 닥칠 것이라는 압도적인 불안'과
'나는 이미 엉망진창인 사람이라는 슬픔과 절망감',
'내세울 것 없이 못난 자신을 비난하는 수치심'이
자해로 인한 신체적 고통을 통해서 잠시 주위가 환기되면서, 마치 줄어드는 듯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런 정서조절 효과만이 자해를 반복하는 사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때에 따라 둘 이상의 효과를 (때론 무의식적으로) 기대하면서 자해를 반복하곤 합니다.
사례를 들기 전에 먼저 밝힐 것은, 이제부터 소개하는 '자해 이유'가 표면적으로는 관계적인(사회적인) 상황을 띄고 있지만, 사실 자해하는 사람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개인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어떤 뜻인지 다음 내용을 이어가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부연설명 하겠습니다.
C는 형제 많은 집안에서 맞이로 자랐습니다. 밑으로 어린 동생들이 줄줄이었기에 C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는 벌써 '다 큰 애'로 여겨지게 되었고, 부모님과 학교생활이나 친구관계에 관한 얘기를 심도 있게 나눌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시피였습니다. 동생들을 돌보느라 부모님은 늘 바빴고, C가 유독 투정을 부린다 싶은 날에는 괜시리 어리광을 피운다며 따끔하게 혼난 기억도 많습니다.
부모님이 C의 용돈을 깜빡하셨던 날, C는 친구와 마을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교통요금이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심하게 당황했습니다. 친구에게 도움을 구해봤지만 언제 갚을 것이냐며 놀리는 투로 거절 당했습니다. 요금통 앞에 서서 전전긍긍하던 C는 결국 버스기사님께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받았지만, 자리에 앉지 못하고 우물쭈물 대던 시간동안 너무나 부끄럽고 괴로웠습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버스 안의 모든 또래와 어른들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아서 버스가 달리는 중이 아니었다면 뛰쳐내렸을 것입니다.
C는 부모님에게 섭섭하고 원망스러워서, 챙겨주시지 않은 잘못 때문에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토로하고 싶었지만, 그 날도 부모님은 동생들에게 집중하느라 C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습니다. 서럽고 눈물이 나는데, C가 울고있는 줄도 모르는 부모님.
C는 목소리를 높여 엉엉 울면서 위아래로 뛰며 자기 머리를 마구 내리치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서야 부모님은 C에게 달려와서 무슨 일이냐며 묻고, 극도로 흥분상태인 C를 안아 달래주셨습니다.
보통 이런 사례를 제시하면 C에 대한 '어른들의' 입장이 갈리곤 합니다.
C의 사정에 이입해서
한편 C보다는 부모님의 사정에 이입해서
C와 같은, 대부분의 경우 C보다 더 극단적으로 방임되는 상황 속에서
준비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버거운 수준의 요구나 정서적인 폭력을 겪고, 마음을 해치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게 되면 첫 자해를 시작하는 건 대개 중학교 나이대 정도가 됩니다. 자해를 반복하면서 시간이 흐르고, 법적 성인 나이에 이르기까지 자해를 중단하지 않고 남몰래 유지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자해하는 사람의 특수한 고충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C의 경우에는 아직 어린 초등생이었기에 갈급하게 부모님의 관심을 바라면서 자해성으로 자기 머리를 때리는 행동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대적으로 더 쉽게 용인 받을 수 있지만 ...
슬프게도 자해하는 사람에게 낯설지 않은 말입니다.
제가 "청소년 자해"를 주제로 한 네이버와 다음 뉴스기사에 달린 댓글의 내용을 분석했을 때(논문 보기), 다량의 댓글에 자주 사용되었던 단어 중 하나가 "중이병"과 "관심종자"였던 것만으로도 예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해하는 사람의 실제 사정을 알아본다면 차마 자해의 이유를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남에게 어떤 상황 설명을 할 때도 불필요한 부가정보는 자동으로 떼어내고 핵심적인 부분만 선택적으로 언급하면서 가능한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을 잇게 되는 게 사람의 본능이자 경제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지나치게 디테일을 살리며 서론이 끝없이 길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할 말만 간단히 할 수 있는데도, 상황이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장황하게 서론을 말하면서 길어지고, 결론적으로는 듣는 이를 지치게 합니다. 이런 습관 때문에 도리어 얘기가 어그러질 때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습관에서 탈피하지 못합니다. 이런 면은 사람 본능과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마치 고통을 초래함에도 불구하고 자해를 하는 것처럼 말예요.
그 사정을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보면 상황 설명을 할 때, 모든 디테일까지 정확하게 하지 않으면 쉽게 오해 받고, 나아가 모함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큰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 실제로 그랬던 뼈아픈 과거 기억이 존재하고요. 그의 긴 서론은 일종의 '방어 수단'인 것입니다. 이 또한 본능적(자기보호)인 것이지요.
자해하는 사람의 경우는 어떤지, 구체적으로 자해가 사회적인 관계 상황에서 어떻게 작용하며
관계에서의 경험이 자해를 반복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 다음 편에서 짧은 사례들과 함께 다루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