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란 Aug 12. 2024

실존적 공포에 대하여

나의 공허와 만날 수 있을까



꼭 필요하지 않은 글을 쓰는 게 얼마만이지 생각한다.


이 브런치는 내가 상담심리학자로서 일종의 포트폴리오적 가치가 있을까 해서 시작했지만, 쓰고 싶은 글보다 써야만 하는 글이 날 압도하면서 서서히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앞서 언급했던 것 같은데 내 이름의 "서" 자는 특이하게도 글 서로 쓴다. 보통 이름에는 잘 쓰지 않는 한자인데 어떤 배경에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엄마가 자의적으로 해석하길 아마도 글로써 빛을 볼 거라는 의미가 아니었겠느냐고 말한 기억이 난다. 


아직, 아니 전보다 훨씬 더 나에게는 '써야만 하는 글의 수'가 늘어났고, 요즘 나에게 글쓰기는 제법 잘 하는 분야이지만 그다지 즐겁지 않은 과업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렇게 오랜만에 심야의 시간에 브런치를 찾은 건, 하루 한 30분으로 글쓰기의 순기능을 기대할 수 있다면 정기적으로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다는 생각에 이르러서다. 내가 아는 글씨기의 순기능은 내 안에 실체 없는 느낌으로 뭉텅이진 감정을 남들과 통용할 수 있는 언어로 정제하는 과정에서 감정과 거리를 두고 차갑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감정을 품고만 있으면 뜨거워서 견딜 수 없으니까. 글로 풀어놓으려면 우울, 불안, 특히 두려움처럼 뜨거운 감정을 접근이 더 쉬운 생각으로 옮기고, 그 생각을 적어도 남이 볼 때 요지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게끔 제3자의 관점이 개입할만한 여지를 얹어서 감정가를 덜고 내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 나의 지금 감정은 펑펑 우는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 마다 가장 약한 감정이 있다.

누군가는 우울, 불안, 수치심, 좌절감. 한국에도 잘 알려진 책 "미움받을 용기"의 이론적 배경이 된 개인심리학을 주창한 알프레드 아들러가 가장 취약했던 감정은 아마도 열등감이었을 것이다. 그는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이 열등감이라고 가정했으니까. 


나에게 그것은 너무나 명백하게 공허감이다.

중학생 시절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공부 강박 때문에 처음 심리상담을 경험했을 때, 지금도 활발히 상담을 하고 있고 직장인 밴드 활동도 하는 당시 나의 첫 상담자는 나에게 매우 조심스럽게 경계선적인 경향이 엿보인다고 했다. 공부를 마친 지금 돌아보건대 아마 당시 나는 강박이나 경계선 상태였다기보다는 청소년기 우울에 가까웠을 것이다. 청소년에게 우울은 종종 짜증과 성마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의 판단에 일면 동의하는 것이 경계선 문제의 정서적 근원은 공허감이고, 지금 나의 주 연구분야인 자살 의도 없는 자해도 경계선 문제와 5할 이상 공통분모를 가진다는 점을 볼 때 그래, 어느 정도 그가 나에게서 무엇을 보고 경계선적 경향을 추측한 것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다. 


인본주의 심리학에서 실존적 공포란 곧 외로움을 뜻한다. 

말 그대로 실존적이라는 것은 당연하게 주어졌기 때문에 극복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째서 당연하게 외로움을 두려워할까? 혼자 태어나서 혼자 갈 수밖에 없는 독신의 존재기 때문이다. 

동시에 외로움은 코로나-19 발발 후 쏟아져 나오고 있는 정신건강 실태 연구 조사가 말해주듯, 심해지면 심리적 '극통'을 일으킬 정도로 강렬하고 괴로운 감정이다. 한치 예상할 수 없는 위험 투성이인 이 삶에 나약하고 도무지 믿을 구석 없는 오로지 나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것. 더군다가 죽을 때도 혼자일 것이라는 것. 공포스러운 게 당연하다. 


글쎄 내가 가장 약한 공허감은 외로움과 비슷하면서도 궤가 조금 다르다. 

어떻게 표현해야 감정을 정제한 글로써 잘 전달이 될까. 외로움이 당연하고도 은은해서 견딜만한 것이라면, 나에게 공허란 참을 수 없을만큼 압도적이어서 조짐이 보이면 무엇으로라도 덮어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잘 알고 있듯, 마주해서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감정은 점점 더 두려운 것이 된다. 불안 치료의 처음과 끝이 노출훈련인 것처럼, 극도로 두려운 걸 대강 덮어 치워버리면 그 몸집을 불리는 꼴이 된다. 


우리 교수님의 책 "서른이면 달라질 줄 알았다"는 나이 서른 넘은 사람이 바뀌기란 하늘에 별 따기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그 별을 따려면, 한 사람의 살아온 습관과 그것 때문에 생긴 좋게 말하면 심지, 있는 그대로 말하면 곤조를 바꿀만한 중대한 결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더 나이들기 전에. 나는 마흔, 쉰 살이 되어서도 공허감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 공허감을 가장 빨리 덮을 수 있는 것은 경험컨대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이 아니었다. 공허감을 이기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혹은 일했다는 이야기는 나에게 별로 앞뒤가 맞지 않게 들린다. 방편은 주로 술에 취하거나 낯설지만 자극적인 상황에 나를 몰아넣는 것이었다. 경계선 경향의 특성은 자신이 결코 평안할 수 없게 삶에 자꾸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 안정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왜 나는 도무지 평화로울 수 없느냐고 불평한다. 경계선 진단을 위해서는 훨씬 구체적이고 많은 요건이 붙기 때문에 나의 경우 첫 상담자의 추측은 착오였지만, 적어도 공허감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해서 급히 처방한 선택들 끝에 불필요한 드라마를 반복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다시 말하지만 더 나이 들기 전에. 내가 마흔, 쉰 살이 되어서도 공허감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  


   

작가의 이전글 다시는 자해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