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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비스 Mar 05. 2024

뒤늦게 풀어보는 말레이시아 한달살기 썰 2

Day1.머릿속엔 액션영화 한편이 뚝딱(feat.그랩기사)

이를 악물고 아이들을 달래며 입국심사를 거쳐 수하물 벨트까지 도착. 쿠알라룸푸르 공항은 참 넓다. 이만큼 오기까지 한세월 흘러버린 느낌. 시간은 어느새 3시반이 넘었다.


카트에 짐을 이고지고 그 위에 아들을 앉혔다. "누우니까 좀 낫다"는 아들의 말로 잠깐 평화로워진 우리. 그 모습을 지켜본 웬 남자가 다가와선 "그랩 그랩"이라며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공항택시보단 저렴한 그랩 기사님이었던 것. 150링깃에 숙소까지 뫼신다는 기사님께 K-줌마 포스로 가격을 흥정하여 최종 140링깃으로 합의했다.


아들은 배가 아프고 딸은 목이 말라 물을 좀 사야 한다는 내말에 내가 다 도와준다며 카트를 끌어주고 물 살 곳도 안내하겠다는 기사님. 말레이 천사를 만난 건가 싶어 기분 좋게 차로 향하는데 뭐지? 주차장이 아닌 웬 옥상 같은 야외로 가더니 "이게 내 차"라며 타라는 기사님.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세워져 있는 승합차에 타라니까 덜컥 겁이 났고, 이걸 타도 되나 싶은 불안함을 억누르며 기사님께 면허증을 보여달라 했다.


흔쾌히 면허증을 꺼내신 기사님께 건네받곤 휴대폰 불을 켜고 보는데... 세상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확인하는 척만 하고 택시에 올라, 당신을 믿지만 야외에 주차된 차를 타려니 무서웠다고 솔직히 말했다.


그런 나를 충분히 이해한다며, 공항 주차장은 돈을 내야 해서 야외에 차를 세우곤 한다는 설명을 덧붙이는 기사님. 휴... 그래 나쁜 사람은 아니야.


이제 가는 길에 물 한병만 사고 숙소로 내리꽂으면 됐다. 딸에게 쫌만 참고 숙소 들어가서 물을 마시라 하기엔 40분을 더 가야 했고 진짜 덥긴 더웠다. 기사님은 한 5분쯤 달려 "여기서 파는 물이 공항보다 훨씬 싸다"며 주유소에 세워주셨다.


아이들만 차에 두고 물을 사러 나가는 동안 머릿속엔 액션영화 한 편이 뚝딱 만들어졌다. 왜 이렇게 영화 테이큰이 떠오르던지. ㅠㅠ


얼른 물을 사들고 나오면서 보니까 내 불안함을 읽은 기사님은 아예 문 밖에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타라는 그의 눈빛과 손짓에 나는 안심하면서도 실시간으로 늙어갔다.


어느덧 새벽 5시가 다 되어 숙소에 도착했다. 호텔 프런트까지 짐을 날라준 기사님께 요금을 드렸더니 고맙다며, 이제 면허증 사진은 지워달라고 했다.


내가 면허증 사진을 찍은 줄 아신 기사님께 I didn't를 연발하며 정신없이 헤어졌다. 친절하고 좋은 분이었는데 내가 너무 의심했나, 명함이라도 받아둘 걸 하는 후회가 들기도 했지만 이미 늦어버린 것.


방에 올라오자마자 배고파 시전하는 딸과 굵똥 한 방에 배가 편안해졌다는 아들에게 햇반을 먹이고 탄수의 힘으로 재웠다. 드디어 참평화를 맞이한 순간이었다.


모든 힘을 다 쏟은 것 같은 한달살기의 첫날이 이렇게 시작됐다. 애들 학교 보내고 나도 영어과외 받으려 했던 생각은 완전히 접었다. 오전에 모아둔 에너지로 오후를 버티며 무탈히 지내다 가야지. 그거면 된다.


장바구니에 담긴 웰컴키트
어느새 해가 뜨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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