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영 Mar 19. 2022

몽환의 별

 제가 케냐에 간 것은 대학교 4학년 1학기 교환학생을 통해서였습니다. 일단 저는 어디든 외국으로 너무 나가고 싶었어요. 해외여행이라곤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중국으로 간 기억밖에 없는데, 저는 언제나 낯설고 이질적인 나라들에 대한 향수가 있었습니다. 그건 영화 때문이었을까요? 고등학생 때는 영화를 정말 많이 봤어요. 현실 도피처였거든요. 새벽에 저 홀로 깨어서 거실에 있는 컴퓨터로 예술영화를 탐미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씨네21>이라는 영화 잡지를 정기구독하던 시절이기도 했고요. 특히나 북유럽이나 동유럽, 스페인의 예술영화들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낯선 미장센으로 가득했고, 그 낯섦은 고통스럽고 지난한 현실을 잊게 만들어주는 모르핀 같은 거였어요. 일본이나 중국, 홍콩, 동남아와 같이 바로 옆 나라가 아니라 저는 아주 먼 곳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해외여행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뭐부터 해야 하는지 잘 모르기도 했었을 뿐 아니라 혼자 가려니 엄두도 안 나고, 돈도 없었어요. 대학교에 들어와서는 술 먹고 연애하느라 바빴고, 그 세계도 충분히 새로운 세계였기 때문에 홀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그것도 1, 2년 지나고 나면 똑같잖아요. 저는 정말 외국에 나갈 결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케냐로 교환학생을 가기로 했냐고요? 이건 그러니까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혼자 계획 못 짜는 건 똑같은데, 혼자서 해외여행을 가면 숙소에만 있을 것 같고, 그러면 돈이 좀 아깝기도 하고, 그렇다고 같이 갈 친구를 섭외하자니 그것도 영 귀찮고, 그럼 교환학생을 가 볼까? 하고 알아봤는데, 알아보니 교환학생 조건이 교환학생 기간이 끝난 뒤 본교에서 1학기 이상을 다녀야 한다는 거였어요. 저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때는 3학년 2학기. 그때 신청해서 된다면 4학년 1학기에 교환학생으로 다녀오고, 4학년 2학기를 본교에서 다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청을 미루거나 떨어진다면 교환학생 기회는 영영 없어지는 것이었죠. 그러니까 저한테는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인 유일한 교환학생 신청 기회였어요. 


그런데 그때 우리 학교는 특이하게도, 1학기에 나가는 교환국보다 2학기에 나가는 교환국의 양질이 훨씬 좋았습니다. 2학기 교환국에는 영국, 미국, 필리핀, 중국 등등 중국어와 영어를 배울 수 있는 나라들이 대거 포진돼 있었고 기간도 1학기에서 2학기까지 다양했었죠. 하여튼 학생들이 나가기 좋아하는 국가와 나가기에 부담 없는 국가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1학기 교환국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베트남, 케냐, 우즈베키스탄 등등의 나라들이 떡하니 있었죠(우즈베키스탄은 제 기억이 맞는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정말 저런 류의 국가였어요). 나라 수도 적었고, 보통 평범한 대학생이라면, ‘대체 내가 왜 여길?’이라고 반사적으로 생각이 들 법한 그런 나라들이었어요. 그러니까 언어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친근하지 않은 곳들이었죠. 그중 유일하게 영어를 배울 수 있는 교환국은 케냐뿐이었습니다. 저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일단 케냐 교환학생에 지원했어요. 어차피 떨어질 수도 있는 데다 붙고 나서 가기 싫으면 그때 생각하지 뭐, 라고 가볍게 생각했고요. 그리고 영어도 저는 기초회화밖에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합격이 될 거라고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붙었습니다. 케냐 교환학생 자리는 4명이었는데 3명만 지원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면접장에서 오줌 갈기고 나오지 않는 이상 붙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 나머지 1명을 충원하기 위해서 2차 모집을 했는데, 정말 웃기게도 2차 면접의 경쟁률은 4:1이었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저는 거의 우주가 떠먹여 주는 셈으로 케냐에 가게 됐습니다. 


저는 케냐 대학교 개강 시기에 맞춰 1월에 출국해, 딱 100일을 지내고 들어왔습니다. 100일 동안 별의별 일이 다 있었지만, 일단 간략하게 얘기해보자면, 저 포함 여자 2명, 남자 2명이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었고, 케냐 대학교에서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 남자애 1명까지 총 5명이 캠퍼스 내 한국인 숙소에 머물렀어요. 지금 케냐에 가면 더 열심히 놀러 다니고 흑인 남성들과의 무릇 스캔들도 즐겨봤을 텐데 그때 저는 상당히 보수적이었고, 그런데 연애 중독에는 걸려 있던 상태라 같은 교환학생이던 한국인 남자애와 은하수 아래, 적색 돌 언덕 위에서 결국 사귀기로 한 건 케냐 생활 중 빼놓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케냐는 적도 근처에 있어서 하늘이 둥글어요. 그러니까 언덕 위에 누워서 고개를 옆으로 돌려도 하늘입니다. 은하수 돔이라고 상상해주세요. 우리는 별들이 곧 우수수 떨어질 것 같은 그 하늘을 보러 거의 매일 밤 돌 언덕에 갔어요. 맥주와 안줏거리를 가지고 가서, 맥주도 마시고, 맥주를 다 마시면 누워 별을 보면서 하염없이 수다를 떨었어요. 입이 다섯 개라 이야깃거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노래를 틀면 노래를 들으면서 별구경을 한참이나 했고요. 9시쯤 가면 12시쯤이나 되어서야 숙소로 내려왔어요. 그때는 별똥별도 두 번이나 봤고요. 한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그 별 하늘이 너무 좋아서 저는 습관적으로 해 왔던 죽고 싶다는 생각을 케냐에서는 하지 않았어요. 죽음을 어떤 심상한 것이나 도피처로 삼지 않고, 그저 자연의 일부로 받아들였던 건 무수한 별들의 존재를 마음만 먹으면 생생하게 내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그때였습니다.


케냐에서는 사파리에 가지 않았는데도 저는 야생동물들을 심심치 않게 마주쳤어요. 길거리에서 검은 물소를 보기도 하고(실제로 그 동물이 맞는지는 모르겠어요), 어느 날엔 친구와 캠퍼스 안에 있는 언덕들을 막 타고 오르면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는 거예요. 분명 날이 쨍했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지나? 하고 하늘을 쳐다봤는데, 새가 날고 있었어요. 그런데 펼친 날개가 비행기 날개만큼 크고 넓어서 저희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보기만 했습니다(그때 친구는 숙소로 돌아가 그 새가 마치 시조새 같았다고 말했다가 타박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직접 본 사람만이 그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날개의 위용을 알 수 있어요. 시조새를 본 적 없지만 시조새에 빗댄 그 마음이 뭔지 저는 알아요). 한 번은 우리 숙소 앞까지 검은 독사가 찾아온 적이 있고요. 저는 무서워서 안 나갔지만 그건 세계 독사 5위 안에 드는 종이라고 했어요. 이외에도 높은 돌 언덕 위에서 저희는 뜬금없이 거북이를 보기도 하고, 밤에 캠퍼스를 산책하다 보면 눈만 야광으로 빛나는 토끼와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밥을 거의 해 먹을 수밖에 없었지만, 가끔 밥하기가 모두 힘든 날이면 교수님들이 가는 교내 식당에 가서 프라이드치킨과 샐러드를 시켜 먹었어요. 하지만 케냐는 우리나라처럼 빠른 나라가 아니라 음식을 두 시간이나 기다린 적도 있습니다. 손님이 저희밖에 없을 때도요. 빨리 나오면 40분? 한 번은 샐러드 밑에서 개미 떼가 줄지어서 쪼르르 나오는 것을 본 적도 있고요. 개미가 정말 끝도 없이 나와서, 제가 마치 개미굴을 함부로 침범한 무례한 인간이 된 것 같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 교내 식당의 묘미는 남자 화장실에 무료 콘돔 자판기가 있다는 거였어요. 여자 화장실에는 그런 게 없었는데.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는 아직도 에이즈로 인해 고통받고 있어서 그런 복지(?)가 존재하는 거라고 했어요. 실제로 대학교 입학 전에 모든 학생은 에이즈 음성 판정을 받아야 하고, 학기 중에는 에이즈 검사를 해주는 텐트가 일시적으로 운영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버스를 10시간 넘게 타고 가서 몸바사라는 휴양지에 여행을 가기도 했어요.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 같은 곳인데요. 거기서 저희는 호텔에서도 수영하고 바다에서도 수영하고 그랬습니다. 저는 그때 사실 수영할 줄 몰라서 바다에서는 튜브를 끼고 놀았고, 호텔에서는 수영할 줄 아는 친구에게 평영을 온종일 배워봤는데, 당연히 실패했고, 다만 그때 제가 물에서 노는 걸 무척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몸바사의 해변에는 낙타가 다녀요. 돈 얼마를 주면 낙타를 타고 하얀 모래사장을 거닐 수 있습니다. 또 튜브를 타고 돌아다니면 어떤 사람이 자기 몸에 튜브 끈을 연결해줘요. 그럼 그 사람은 헤엄치고 저는 튜브 위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둥둥 떠서 해변에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지점까지 갑니다. 몸바사의 어떤 택시 기사는 래퍼랬나요. 자기가 작곡한 랩이 담긴 믹스테이프를 틀어 놓고 어떤지 물어봤어요. 우리를 바닷가에 내려놓고는 자기도 같이 내려서 우리와 같이 기념사진을 찍었고요(어찌 된 영문이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는 레게머리를 한 젊은 남자였습니다. 


제 외장하드에는 이 문장들이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사진들이 가득 있어요. 사실 사진이 없었다면 저도 꿈속의 이야기라고 착각하게 될 만큼 케냐의 풍경들은 내게 모르핀 역할을 해주던 낯설고 신비롭고 이질적인 영화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한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너무 신비로워서 꿈결 같은 것들은 가끔 제 기억에만 묻어두고 함부로 발설하고 싶어지지 않을 때가 있어요. 글이든 말로든 그것을 재현하려고 하는 순간 이게 제가 지어낸 거짓말처럼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저는 아직도 케냐에서 급식실에 가 아침마다 받아먹던 만다지의 기름 맛과 아주 딱딱하고 조금 쫀득한 식감, 차이의 톡 쏘는 듯하면서 달곰하고 조금 맹숭한 맛을 기억합니다. 만다지에는 버터나 딸기잼을 발라 먹으면 정말 맛있어요. 꼭 따뜻한 차이와 같이 먹어야 하고요. 한국에는 케냐 음식점이 없는 것 같아요. 있다고 해도 쌀쌀하고 신선한 아침 공기와 함께 먹는 만다지와 차이, 그리고 밤하늘에 넓은 도랑처럼 펼쳐진 은하수는 꼭 케냐에서만, 그것도 제가 있던 그 시골에서만 재현될 수 있을 거예요. 지금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돌 언덕에 누워 별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죽음을 자연의 일부라고 온몸으로 지각했던, 그 시절의 나를 생생히 느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적어보는 것은, 어쨌든 나의 한 시절이 낭만과 몽환의 별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스스로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오래된 영화를 언제까지고 돌려보듯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