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잘 지내느냐고 물으신다면
아이가 지금은 잘 지내나요?
대외활동이 적은 탓에 나를 적당히 아는 사람-내가 ADHD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를 책으로 썼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가 기대하는 엄마 혹은 작가의 품성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는 것을 아직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일이 드물다. 어쩌다 만나면, 그들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한결같이 물어온다. 아이가 지금은 어떠냐고. 언제부터 괜찮아지더냐고. 얼마나 궁금하겠는가. 더군다나 그가 아이로 인해 고민 중인 부모라면, 누구보다 절박한 마음으로 건네는 질문이라는 걸 잘 안다.
네. 아이는 잘 지냅니다. 그런데요,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아이는 원래 잘 지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쭉. 10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좌충우돌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지만, 아이는 살아있음을 즐거워했다.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아이니까. 그게 얼마나 고맙고, 그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이제 알았다. 그러니까 잘 지내게 된 건, 아이가 아니라 나다. 아 이것도 오해하면 안 되는 게, 어디까지나 '전'보다는 잘 지내게 됐다는 뜻.
구체적으로 어떻게 잘 지내나요?
안다. 내게 바라는 대답이 뭔지. '잘 지낸다'라는 말이 내포하고 있는 많은 바람들을. 과격함과 충동성으로 주목받는 일은 줄었는지, 아직도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자주 전화를 받는지, 간간히 친구와 주먹다짐을 하지는 않는지, 지금도 약물치료를 시작하지 않았는지, 학업 성적은 괜찮은지...수많은 고민을 차마 구구절절 늘어놓지 못하고 단 한 마디, '잘 지내느냐'에 실어보내는 그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올해 5학년이 된 아이가 엊그제 첫 유인물을 들고 왔다. 학생교육 기초조사서다. 언제나 핵심은 <선생님께 하고 싶은 말> 이다. 올해도 부탁을 가장한 당부를 정제된 표현들로 꽉꽉 채웠다. 발표를 자주 시켜줬으면 하는 바람까지, 그럴 듯 하게 포장해서.
4년 전, 아이가 1학년일 때 조심스럽게 채워 넣었던 문장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문장을 적는 내 마음은 확연히 달랐다. 미안하지도 움츠러들지도 않았다. 전에는 아이의 부족한 점을 가리기 위해 좋은 점을 끼워 팔았다면, 이제는 아이의 칭찬을 적는 손이 제법 떳떳했다. 부족한 점이 좋은 점을 가릴 정도로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아이의 현재를 확신하는 덕분이다.
밖에서 놀다 들어온 아이가 은밀하게 쪽지를 접어 저녁 내내 들고 다닌다. 몹시 눈에 띄는 몸짓으로 감추는 통에 모른 척을 하려야 할 수가 없다.
"하라, 그게 뭐야?"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소중하게 지니고 다니더니, 거실에 흘려놓고 잠이 들었다.
이중으로 꼭꼭 싼 쪽지를 열어보고 피식 웃음이 흘렀다.
절대로 정대윤한테 복수하지 말기
정대윤(가명)은 아이와 가장 친한 동네 동생이다. 서로가 서로의 든든한 지원군이며, 짬나는대로 약속을 잡아 노는 사이. 그 정대윤과 뭐가 틀어졌는지, 그날따라 집에 일찍 들어왔다 싶었는데 못내 기분이 나빠 복수를 결심했던 모양이다.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을 오래오래 간직하는 아이는, 복수의 마음도 오래 품는다. 비록 실행하진 못할지라도 마음이라도 품어 상대를 단죄하고 싶은 거겠지. 복수하려는 마음으로 상대를 보면, 상대가 뭘 해도 미워보일 수밖에. 그럼 그들의 시간은 더 이상 즐겁지 않게 된다. 아마도 그래서, 아이는 복수하지 말자고 마음을 고쳐먹었을 게다. 고쳐 먹었으면 싸웠던 사실조차 훌훌 털어버려야 하건만, 또 그럴 자신은 없었던 게지.
'복수'의 결의는 적지 않아도 뼈에 새기지만, '복수하지 않을' 결심은 종이에 옮겨야만 겨우 기억하는 선택적 기억력. 그렇지만 종이에 옮겨서라도 꼭 지키려는 철두철미함, 그래 놓고 아무데나 쪽지를 던져두고 잠자리에 드는 허술함. 어떨 땐 성악설의 대표주자 같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여린 저 심성까지. 참으로 복합적인 녀석이다. 그러니 보고 있노라면 기특하다가도 딱하고, 뿌듯하다가도 짠하다.
지난 주말엔 친구들과 어울려 축구를 하다가 단단히 골이 났다.
"난 가만히 있었는데!! 자기들이 내 손 있는 데로 공을 차 놓고 나보고 반칙이래!!! 지인짜 나쁜 놈들이야!"
"하라야, 그게 축구의 규칙이야. 축구에서 공이 손에 닿으면 핸들링 파울이야. 그냥 파울이니까 파울이라고 말한 것 뿐이야. 친구들이 일부러 짜고 너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고. 작정하고 너를 골탕 먹이려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거 같냐? 그런 일은 진짜 드문 일이야, 엉? 그래도 그렇게 억울해?"
돌아오는 길, 첫 고속도로 운전으로 잔뜩 긴장한 나를 대신해 제 아빠가 있는 힘껏 품을 들여 설명해 봐도 아이의 마음은 요지부동이다. 친구들이 저를 골리려고 정확히 제 손을 노려 공을 차고, 합심하여 저를 내쫓았다는 것이다. 그럴 리 없다. 그 정도의 실력자도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 아이를 오랫동안 봐 온, 친한 친구들이다. 구태여 그런 흉계를 짜 아이를 몰아붙일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아이는 자신에게로 향하는 지적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저 부당하다고만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평소 쓰던 내 차에 비하면 코뿔소같이 거대한 남편의 차를 끌고 고속도로를 달리느라 몹시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나는 그저 이렇게만 말해주었다.
"하라야, 너라서 그 일이 일어난 게 아니야. 그 일이 일어난 곳에 네가 있었던 것 뿐이야. 세상이 너에게 불친절하기 위해 호시탐탐 너를 노리고 있지 않아."
그 말을 하며 마을 입구로 들어가기 위해 커브를 틀다가 앞바퀴를 경계석에 올리는 바람에 남편에게 된통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말이다. 고속도로 운전을 마음 먹은 것부터가 얼마나 고무적인가.
그러니 말이다. 어울려 축구를 하게 된 것부터가 얼마나 고무적인가, 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