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야기의 시작
먼지 낀 선풍기 바람을 타고 요람처럼 흔들리는 모기장을 넋없이 바라보며 우리의 미래를 그렸다. 이집트에서 만난 우리가 둘만의 여행을 시작한 지 일주일째였다.
잠이 없는 나는 언제나처럼, 잠들어 있는 너의 뒷모습으로 시선을 옮긴다. 살짝살짝 나폴리는 옷자락 안으로 굽은 등이 보인다. 따뜻하고 아련한 나의 시선.
"너와 일상을 공유하고 싶어. 같이 가는 단골 식당이 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며 웃던 너의 미소를 떠올린다.
우리의 요즘은 일상이 될 수 없고, 우리가 가는 식당은 늘 새로운 곳이었다.
좋아하는 음식보단 먹을만한 음식을 찾아야 하고, 안전함과 저렴함의 사이에서 잠깐의 회의를 거쳐야 하는 아주 단출한 선택지속에 함께 행복한 데이트를 이어갔다.
우리는 이집트에서 만났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도, 사랑이 싹튼다던 유럽도 아니었다. 밥 한 끼에 2000원을 넘지 않고, 매일 로션도 바르지 않은 얼굴로 나가 물에 홀딱 젖어 돌아오는 곳이었다.
우린 그곳에서 웬만한 오래된 연인보다 더 많은 아침을 함께 보낸, 아니 가족을 제외하면 생에 가장 많은 아침밥을 나눠먹는 사이였다.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장기여행을 해 보겠어'라는 단순한 모토로 2년 동안 여행을 하고 있던 그는 여행에 흥미가 다 떨어진 상태였고, '내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내 맘대로 살 거야'라는 철없는 모토로 계획했던 반년을 넘겨 여행을 하고 있던 나는 생각보단 찬란하지 않은 여행에 지친 상태였다.
처음엔 선한 그의 마음이 좋았다가, 다음엔 예쁜 미소가 좋았고, 나중엔 입술 옆에서 목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점까지 좋았다. 그러다 보니, 그저 혼자서는 무섭다는 단순한 이유로 함께하게 된 둘만의 아프리카 여행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동행이 되었다.
몇 번의 사랑이 같은 상처를 주고 떠나간 터라 나는 믿음이라는 게 부족한 상태였다. 누구든 처음엔 이랬고, 누구나 그렇게 변해갔었기에. 그를 매력적이게 만들고 있는 푹 들어간 이마가 얼마 못가 날 향해 찌푸려질 거라는 엇나간 미래를 혼자 그리며 행복함 속에 스스로를 괴롭혔다.
기간을 늘려야 했다.
그 누구들과 같이 언젠가 내게서 떠나갈 사람이라면, 내 옆에서 웃어주는 그 시간들을 좀 더 갖고 싶었다. 이 사람이 설사 나의 운명이라 불릴 만큼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붙잡고 싶었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여행은 수년간 나를 챙기지 못한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나는 여행하는 동안 오직 나만 생각하고, 내 행복을 위해 움직였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내가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내가 멈추고 싶을 때 멈춰 서며 스스로에게 지영아 행복해라. 행복해라. 주문을 외웠다.
나로 가득 차 있던 여행의 작은 빈틈으로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온 이 마른 남자는, 결국엔 나를 소란스럽게 했다.
겨우 행복해지려던 나는 또 한 번 모험을 떠났다.
스스로 찾아낸 행복보다 더 큰 행복과 그 보다 조금 더 큰 불안감을 안겨준 그를 따라가 볼까 싶어 내민 손을 조심스레 움켜잡았다.
아프리카 일정이 끝나면 나는 남미로, 그는 인도로 가는 것이 정해진 루트였다. 그리고 나는 인도로 방향을 틀면서, 예상치 못하게 지구 두 바퀴를 돌게 되었다.
이 선택의 결말로 내게 어떤 마음의 변화가 올 것이며 또 내 여행이 어떻게 흘러갈지, 더 나아가 광주 남자와 서울 여자의 연애의 끝이 어떻게 될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나는 당장 잡고 있는 이 사람의 손을 추호도 놓고 싶지 않았다.
내 곁에서 영원히 머물러줄 사람이라는 믿음 때문에 한 선택이 아니라, 내가 언제나 '지금 행복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기에 한 결정이었다.
이것이 혹여, 먼 훗날 나를 주저앉아 울게 하더라도 나는 현재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