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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영 Jan 08. 2018

여행지의 인연과 연인

그를 만났다


다합에 도착해 며칠 동안 아팠다. 몸이 아픈 것은 여러 방면에서 익숙하다. 보아하니 일주일짜리 아픔이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숙소가 있는 곳까지 트럭 택시를 타며 기사 아저씨와 가격으로 실갱이를 했다. 휙 돌아서는 나의 뒤통수에 알아듣지 못하는 저주를 퍼부었던 것 때문인가 보다. 기운이 하나도 없자 이 평화로운 해안마을에서 숙소의 푹 꺼진 침대 밖을 벗어나지 못했다.



까만 피부에 비쩍 마른 몸. 배낭은 내 것의 두배쯤 되어 보였다. 그가 짐을 메고 있는 것인지, 짐이 그를 타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한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떠돈 보따리장수 같아 보였다.


한 방 식구가 된 진우를 반갑게 맞이하던 중, 내가 깨끗이 나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놀랍게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가 많지 않은 다합은 아파트 렌트가 성행했다. 마음이 맞는 7명이 모여 집을 렌트했다. 방 두 개에 모두가 둘러앉기에 충분한 거실이 있는 곳이었다. 비록 룸메이트가 좀 많긴 했지만, 한국에선 이루지 못했던 내 집 마련의 꿈을 이집트에서 달성하게 된 셈이었다.


프리다이빙과 스쿠버다이빙 교육이 끝나 자격증이 나온 후엔 프리다이빙 연습을 하거나 장비를 빌려 스쿠버다이빙을 했다. 밤이 되면 각자의 시간을 보낸 식구들과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만들어 먹고 함께 영화를 보고,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었다. 걸어서 나갈 수 있는 집 앞바다에는 열대어와 형형색색 산호가 가득했고 날씨는 매일같이 화창했다. 심지어 물가는 지금까지 갔던 그 어느 곳보다도 저렴했기 때문에 다합에서의 생활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다합은 어쩌면 많은 여행자들이 말했듯 ‘천국’이 아니었나 싶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진우는 나와 비슷해 가장 많은 시간을 공유했다. 전쟁통에도 아이는 태어난다고 했다. 이게 상황에 맞는 표현이 될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는 사랑에 빠졌다. 그가 여전히 나를 "지영 씨."라 부르던 때였다.







여행이 피워낸 사랑은 사실 여러 가지 양념을 쳐 가려버린 상한 생선조림 인지도 모른다. 이미 상한 생선에 각종 야채와 양념을 사정없이 때려 넣고 졸여버려 그 풍취를 숨겨버린 것일지도. 실제로 다합에서 매일 점심으로 먹던 천 원짜리 생선 튀김도 그랬다. 상했는지 싱싱한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튀겨져 나왔으니 신선도 따위는 그다지 신경 쓸 사항이 아니었다. 맛이 좋았고, 그거면 충분했다.


여행지가 주는 설렘과 낭만은 사랑이 주는 그것과 비슷하다. 내가 이 풍경과 상황을 사랑하는 것인지, 혹은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완벽하게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단연컨데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내가 이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준 이유가 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아프리카 대륙을 함께 여행하고 나면 행선지도 달랐다. 한국으로 돌아가도 광주에 산다고 했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론 광주에 갈 일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사람을 만지고 싶었고, 그거면 충분했다.




다합을 가장 먼저 떠난 건 진우와 나였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던 첫날, 함께 비행기표를 구매했다. 오랜 여행으로 누구와도 얼추 동행이 불편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라 일정이 비슷하다는 계기 하나로 일행이 된 것이었다. 이렇게 행복한 여정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다합을 떠나는 것이 싫었지만 비행기표를 날릴 수는 없어 오랜만에 배낭을 둘러멨다.


마을을 들어올 때 탔던 트럭 택시를 올라타고 터미널로 향했다. 늦은 밤이었지만 식구들이 모두 밖으로 나와 손을 흔들었고 천천히 작아지다 결국은 보이지 않을 때쯤 나는 눈물을 훔쳤다. 그는 나를 보며 "난 이미 헤어짐에 도가 텄다."라고 말했다. 해가 지는 밤이었다. 다합의 식구들과는 그렇게 헤어졌다.


여행을 하는 동안 짧게는 서너 시간, 길게는 한두 달,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여행지에서는 만남과 이별이 무조건 공존한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여행 8개월 차에게는 조금 벅찼을 뿐.


방금 진 그 해가 다시 떠오를 때쯤 이 눈물이 마를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잡고 있는 이 손을 놓을 날도 언젠가는 올 것이다. 나는 그 날을 맞이할 준비를 지금부터 부지런히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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