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하는 삶에 대하여
나는 유기견 30마리와 유기묘 9마리를 돌보는 수의사이다. 이 아이들은 제각기 다른 사연을 품고 나에게 온 아이들이다. 그리고 나의 병원에서는 보호소에서 온 아이들을 최소한의 비용으로 치료를 해주고 있으며 한 달에 한 번 동물보호소에 봉사를 나간다. 사람들은 이런 나의 삶을 보고 훌륭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언제까지 그렇게 살거냐고 걱정하기도 한다.
나는 내 삶이 훌륭하다고 생각지도 않고, 그렇다고 걱정할 만큼 나의 삶의 질이 떨어져 있지도 않다. 물론 나는 나만을 위한 욕망은 많이 내려놨지만 오히려 그러고 나자 더 충만한 행복과 평안이 찾아왔다. 그렇지만 봉사하는 삶이 항상 행복에 젖어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벽은 높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티끌만도 못할 때가 많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나라의 유기 동물의 상황이 좋아질 리 만무하며 하다못해 내가 봉사하고 있는 보호소 하나도 변화를 일으키기 쉽지 않다.
이런 현실을 아는 사람들은 동물을 좋아하지만 나처럼 현장에서 그걸 체험하기 꺼려하시는 분들도 많다. 그분들의 입장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봉사를 하면서 느끼는 수많은 좌절감과 무력감은 나도 외면하고 싶고 도망가고 싶게 만든다. 그러나 내가 이들의 손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나라도 그들의 열악한 현실에 저항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조차 저항하지 않으면 희망조차 없는 그 현실을 오롯이 감내해야 하는 것은 동물들의 몫이 된다. 동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느냐 없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희망에 걸맞는 노력을 다하고 있는가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삶을 산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도 이와 비슷하다. 내 삶이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큰 사랑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무엇이 너의 영혼을 높이 끌어올렸는가? 무엇이 그대의 영혼을 가득 채우고 기쁨을 주는가? 프리드리히 니체의 질문에 가만히 답을 하다 보면 내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다. 나에게는 저 물음의 답이 모두 동물을 향하기에 그들을 위해 사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면서 허무하다고 느끼거나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때를 보면, 자신의 삶이 또는 자신이 이루어 나간 것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이다. 타인을 돕거나 누군가의 힘이 되어줄 때 우리는 우리 존재의 의미를 실감하고 순수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 즉 봉사하는 삶은 우리에게 또 다른 삶의 활력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봉사의 대상이 다 그러하겠지만, 동물의 경우 그들이 바라는 바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자고 쉴 수 있는 포근한 보금자리와 마실 물과 먹을 양식이 그 전부이다. 이런 기본적인 욕구도 채워지지 않는 동물들을 도우려 노력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가 얼마나 가진 것이 많은지 절실히 느끼게 된다. 이미 가진 것이 이렇게 많은데 뭘 더 욕심을 내나 싶어진다. 난 이것이 봉사가 가진 가장 큰 순기능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삶 속에서 행하는 작은 선의의 봉사와 기부는 균형 있는 삶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나 자신만을 위한 욕망과 돈을 밤낮으로 쫓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욕망들은 채우면 채울수록 마음은 더욱 공허해진다. 현대인이 갖는 불안과 공허를 잘못된 방법으로 극복하려 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만이 아닌 타인이나 다른 생명체를 위해 작은 일을 하면 생각보다 내가 얻는 것이 많다. 나를 희생하는 이타심이라기보다는 나에게 있는 것을 조금 나눈다는 생각의 봉사는 장담컨대 그토록 갖고 싶었던 충만함을 선사할 것이다. 조금씩 모두가 힘을 합친다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은 어쩌면 더 희망차게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