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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지 Dec 01. 2024

왜 하필 고성인가요?

내가 한 달에 한 번씩 도망치는 이유

01

최근 1년 동안 저를 만난 사람이라면, 제가 습관적 도망자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을 거예요. 저는 매달 고성으로 도망치는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는 워케이션이라는, 리모트 워크라는 말을 하지만 저는 정말 절박하게 그것을 '도망'이라고 부릅니다. 도망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거든요.


02

시작은 2023년 6월에 회사에 워케이션 제도를 만들었던 거예요. 여행을 떠나라고 말하는 브랜드를 담당하고 있으면서 일이 많다는 이유로 휴가를 못 가고 있던 상황. 이런 상황에선 그 누구도 좋은 생각이 나올 수 없다는 마음. 그중에서 일이 적지 않은 내가 먼저 떠난다면 다른 이들도 좀 더 편하게 이 제도를 이용하지 않을까하고요. 결과적으론 저만 1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워케이션을 떠났고, 다른 이들은 자발적으로 워케이션을 떠난 사례가 없었습니다. 


03

그래서 그 도망친 고성에 가면 뭘 하냐구요? 일단 도착하면 일을 할 수 있는 맹그로브 고성의 워크앤라운지에 일찍이 자리를 잡습니다. 준비된 책상과 듀얼 모니터로 평소와 다름없이 일을 합니다. 가끔은 사무실에서보다 더 오래 일하기도 해요. 집중이 잘 되거든요. 교암리에 위치한 식당에 들러 점심을 챙겨 먹고 다시 일에 집중합니다. 일이 끝나면 일단 안마의자에 가서 30분 쯤 안마를 받고, 미리 골라둔 책을 읽습니다. 저녁은 안 챙겨 먹을 때가 더 많아요. 바다가 잘 보이는 포커스 존에 앉아 한참을 읽다 너무 늦지 않게 일어납니다. 다음 날 새벽에 일출을 봐야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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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너머로 떠오르는 해를 보는 일은 제가 맹그로브 고성에 오는 가장 큰 이유일 거예요. 이런 풍경은 오직 여기서만 가능하니까요. 전날 봐둔 일출시간보다 30분쯤 이르게 일어납니다. 세수도 하지 않고 겉옷만 챙겨 입은 뒤 바로 뛰어나가요. 3분이면 바닷가 앞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를 관찰하며 1시간 정도를 모래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 풍경 속에 많은 생각을 하기도, 생각을 비우기도 하고요. 이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아서 핸드폰에 기록을 남겨두기도 합니다. 


05

처음 이 바다 앞에선 나를 구원해달라,고 소리쳤던 것 같아요. 그땐 정말 사람, 일, 커리어까지 모든 것이 힘들었거든요. 그러나 바다에서 해를 마주하는 경험이 늘어날 수록 구원을 바라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어떤 것도 나를 구원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나를 구원하는 것은 나 스스로일 수 밖에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을 깨닫게 해준 것도 역시 맹그로브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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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그로브에서 만난 사람들은 제게 내가 지금 걸어온 길만이 정답이 아님을, 아니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어요. 사람 때문에 고민하던 순간에 큰 힌트를 준 책(<핑!>, 아니 카스티요)을 만나게 해준 것도, 기획 때문에 머리를 싸매던 순간에 공부하는 커뮤니티(앤드엔)의 존재를 알려준 것도 모두 맹그로브에서 만난 사람들이 덕분이었으니까요. 덕분에 완전히 고갈되어 있던 저는 다시 움직일 수 있었어요.


07

고성에서 보낸 1년 반이 제게는 인생에서 가장 많이 바뀐 시간일 것입니다. 고성으로 도망치기 시작한 이후 저의 일과 삶의 방식은 전과 너무도 달라졌어요. 누굴 위해 일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위해 생각하고 움직이는 삶. 사무실에 앉아 오래 일하면 좋은 답이 나올 거라던 과거의 저를, 지금은 퍽 가엽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던 그 시절의 저는 그래서 앞이 깜깜하도록 힘들었나 봅니다.

 

08

2023년 6월 이전의 저와 지금의 저는 너무 달라서, 저를 오래 알던 지인들은 많은 부분에서 깜짝 놀라곤 합니다. 새로운 사람과 같이 대화를 하는 것조차 힘들어하던, 도움을 청하는 방법을 모르던 제가, 이제는 쉽게 손 내밀고 말을 걸고 있으니까요. 내가 나의 벽을 쌓아 스스로를 힘들게 할 때 손 잡아 준 사람들을 떠올리며 남의 손을 잡을 때도 있고요. 그 모든 일들이 제게 어떠한 의미로든 다시 돌아올 것도 이젠 알고 있습니다. 남을 돕는 것이 결국 나 스스로를 돕는 일이더라구요.


09

고성으로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내게로 더 많이 더 빨리 돌아왔습니다. 더 먼 곳으로 갔지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평생 고성을 잊지 못할 것 같아요. 고성에서 만난 사람들을, 고성에서 보낸 시간들을 애틋히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추운 겨울 바다 앞에 시린 손을 감추며 바위처럼 앉아 있던 그 1시간 때문에, 평생을 고성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가는 선택을 하게 되리라는 무모한 생각도 듭니다.


10

내가 선택한, 내 인생의 도피처. 헤매고 있더라도 나의 중심을 잡을 수 있는 곳. 다시 일어날 힘과 용기를 주는 바다가 있는 곳. 밀려오는 파도를 보다보면 모든 걸 인정하게 되는 곳. 지금의 고민과 생각보다 더 큰 것을 향해 고개를 들 수 있도록 시간을 허락하는 곳. 그래서 고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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