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 토스카나에서의 일출
자다가 눈을 떴다. 환했다. 벌써 해가 뜬 것 같았다. 에이,망했네. 해 뜨는 거 보고 싶었는데. 얼마나떴나 보기나 하자 싶어 창문을 열었는데 해는 이제 막 지평선에 실금을 그리기 시작한 상태였다. 그런데 뭔가 심상치 않았다.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찰나라는 것을 직감했다. 안경을 꼈다. 잠옷 위에 코트를 입었다. 맨발로 운동화를 신었다.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웠더니, 자기는 더 자겠다며 나에게 자기 카메라를 건내줬다. 오른쪽엔 필름 카메라, 왼쪽엔 디지털 카메라, 주머니엔 핸드폰. 총 3개의 카메라를 장전하고 나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태리 토스카나 지방의 피엔짜(Pienza)라는 작은 마을. 어젯밤 우리가 잔 호텔 바로 옆 골목으로 20m만 뛰어나가면 토스카나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놀라운 곳의 심장에 들어와 있는 건지 알려주는 풍경이 호텔 바로 옆 골목 끝에 있었던 것이다. 지체없이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사진 한 장 찍을 때마다 소리를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떡해. 어떡해. 이게 뭐야.” 진짜로 소리를 막 질렀다. 연예인 극성팬처럼. 누가 봤다면 미친 동양 여자가 마을에 나타났구만, 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씻지도 않고, 머리는 산발인 채로 카메라를 들었다가 휴대폰을 꺼내서 사진을 찍었다가 또 다른 커다란 카메라를 꺼내서 찍었다가 막 이상한 언어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였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풍경이었다. 올리브 나무잎들이 바스락바스락 부딪히며 소리를 내고 있었고, 그 바로 옆으로 짙은 푸른색의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보디가드처럼 일렬로 서서 풍경을 비호하고 있었다. 해는 뜰락말락 망설이고 있었고, 덕분에 땅으로 가라앉은 안개들도 물러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다. 덕분에 풍경은 더 다채로워졌다. 어떤 땅은 붉은색, 어떤 땅은 부드러운 갈색, 어떤 땅은 초록색, 거기에 안개가 더해진 부분은 또 완전히 다른 색. 제각기 다른 색들이 마치 유명한 화가가 고심해서 칠해놓은 것처럼 어울리고 있었다. 새들은 하늘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고 있었고, 저 멀리 노루가 뛰어가는 것처럼 차 한 대가 꼬물꼬물 달려가고 있었다. 시선을 좀 더 멀리 두면 벌써 해가 닿은 건너편 마을이 보였고, 좀 더 가까이 두면 아직 아침이 오지 않은 언덕 위 집 한 채가 보였다. 그리고 그 모든 풍경 한 가운데에 내가 있었다. 자연에 이토록 열광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내가. 해의 높이에 따라 조금씩 변하는 풍경의 색깔에 미치도록 날 뛰고 있는 내가 있었다.
마침내, 올리브나무 사이로 해가 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풍경은 또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올리브나무는 언제나 회색 빛 초록색이라 생각했는데, 그날 아침의 올리브나무는 당장이라도 금색 열매를 떨어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면서 들판은 물기를 잔뜩 머금은 짙은 색이 되었다. 건너편 마을은 해를 정면으로 받아 또 하나의 태양처럼 빛났다. 그 사이 사이로 어둠들이 미적거리고 있었다. 아직 물러가지 않은어둠과 이제 막 당도한 빛이 어우러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어느 순간 소리 지르는 것도 멈췄다. 그런 자연을 바라보며 경박하게 소리를 지를 수는 없었다. 이 자연 앞에서는 경건해야 했다. 경건하고 싶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20대 초반, 처음 스위스의 풍경을 보며 “뭐야, 이건 달력이랑 똑같잖아.”라며 심드렁했던 나였다. 푸르른 산도, 산꼭대기 만년설도, 진짜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소도, 그 옆에 쨍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계곡물도, 그림처럼 걸려있는 집들도 나에겐 너무 뻔하게만 느껴졌다. 이태리에서는 쓰레기통에 그려진 그림에까지 시선을 주던 내가, 스위스의 이름 모를 꽃은 지나치고 있었다. 이태리에서는 골목골목 안 궁금한 게 없어서 내내 분주했던 내가, 스위스에서는따분했다. 어서 떠나고 싶다고만 생각했다. 그 여행 이후에 나는 내가 자연에 둔감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자연에 감동하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모조리 인간의 산물이었으니까. 미술관을 좋아했고, 오래된 벽을 좋아했고, 사람이 만든 것들을 좋아했고, 사람의 손길이 닿은 것들을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놀라운 자연 앞에서 나는 경건해지려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고 아주 천천히 내쉬고 있었다. 사람은 변한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 아침, 숙소에 들어와 신발을 벗는데, 뒤꿈치가 다 까져서 피가 나고 있었다. 그것도 몰랐다. 아름다움에 취해,자연에 놀라, 햇빛의 움직임에, 올리브 나무잎의반짝거림에 골몰하느라, 소리지르며 감동하느라 뒤꿈치가 피가 나는 것도 모르는 내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처음 만난 아침이 있었다. 하지만 나를 가장 절망하게하는 것은 피나는 뒤꿈치가 아니라 나의 문장이다. 지금 이 글은 그 아침의 아름다움 근처에도 가닿지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실패하고 말았다. 나의 언어는 이토록 빈약하기에 결국 사진을 내밀어 본다. 피가 나도록 뛰어다녔지만 이 사진 역시도 그 아름다움의 근처에도 가닿지 못하고 있지만.
낯선 공간, 낯선 시간, 낯선 사람들을 탐닉하는
한 카피라이터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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