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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ternalYoung Feb 03. 2024

디아스포라의 망명과 고향(5)

Leila S. Chudori의 『집』 (Home)과 Linda Le의 『중상모략』 (Slander)를 중심으로


4.     고향


 망명이라는 ‘고향의 부재'라는 상황은 재구성된 고향의 의미에 대한 필요를 만든다. 고향은 그곳을 떠난 유랑자에게도 다시 돌아갈 희망의 공간이며, 다시 돌아가야 할 삶의 뿌리다. 그러나 망명자는 뿌리가 뽑힌 개체로, 어떤 상황의 변화가 없는 한 고향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땅이 된다. 망명지에서의 고난의 시간동안 고향에 대한 강렬한 향수를 품은 자가 꿈꾸는 고향과, 망명을 통해 자유와 탈출을 시도한 자의 고향은 같은 곳일 수 없다. 그리고 모든 디아스포라 의식은 실제든 상상이든 고향과 연결되어 있다. 디아스포라는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같은 기원을 가진 사람들을 연결하고 그 관계를 강화시키는 정치적, 문화적 실천이다. 


 거의 대부분의 디아스포라 의식은 고향 땅에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어떤식으로든 드러낸다. 그러나 귀환이 꼭 말 그대로의 귀환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귀환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도 언젠가 돌아간다는 생각이 연대의식을 뒷받침할 수도 있고, 귀환의 서사에서 안전하고 편안하며 소외되거나 차별받지 않는 곳의 회복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고향에 대한 나쁜 기억은 디아스포라에게 두려움을 상기시키거나 족쇄로서 작용한다. 또한 물리적 고향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은 디아스포라가 새로운 고향을 모색하도록 만든다. 특히 고향에 아주 돌아가 수 없는 망명자의 경우, 고향의 정체성을 고국이나 민족과 중첩시켜 바라보거나 혹은 근대 국민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공동체의 꿈을 보여주기도 한다. 고향은 상실의 기제인 동시에 고향에서의 체험을 사후적으로 서사화하는 과정에서 정체성의 혼란과 같은 다양한 가능성의 기제로 작동한다. 망명지에서 고향에 대한 강한 향수를 느꼈던 인도네시아인 디아스포라는 결국 귀환이주의 서사를 완성한다. 고향은 반드시 돌아가야만 하는 곳이었다. 이때 디아스포라의 귀환은, 고전적 디아스포라인 유대인들의 징벌로서의 망명과 망명지에서의 고난, 고난 이후의 구원으로 이어지는 망명의식과 닮아있다. 한편, 탈출과 자유를 추구했던 베트남인 디아스포라에게 고향은 근친상간적인 관계로서 상상된다. 이미 떠나온 고향은 돌아가고 싶은 곳도, 돌아갈 수 있는 곳도 아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무엇보다도 고향에서 느낄 것으로 예상되는 포근함과 환대, 혹은 정체성에 대한 실존적인 의문 때문이다. 이들은 고향으로의 귀환보다는 제3의 공간 모색을 선택한다. 


 귀환과 제3의 공간 모색이라는 고향의식의 차이점은 디아스포라의 내재적 성질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디아스포라 개념은 민족국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근대적 성격이 강한 개념이다. 누가 어떤 목적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디아스포라는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두가지 쓰임새를 갖는다. 하나는 민족주의를 떠받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반대이다. 전자는 차이를 없애고 동질화하며 복잡성과 다양성을 단일성으로 환원한다. 더 비판적인 태도인 후자는 인간의 여러가지 경험을 분석하고 구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귀환으로 완결된 고향의식은 인도네시아 디아스포라의 민족주의를 위해 봉사하고, 제3의 공간 모색으로 이어지는 고향의식은 가족 및 민족주의 너머를 상상하도록 한다. 


4.1   『집』 (Home)에서의 고향의식 : “진정한 집" 과 귀환이주


 『집』 (Home)의 주인공들은 강제로 추방 당하여 타의에 의해 모국을 떠났다. 이들에게 최고의 시나리오는 정착이 아니라 그리운 모국으로의 귀환이다. 이들이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모국으로부터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국에 대한 그리움을 잃지 않는다. 이들이 모국과 고향에 갖고 있는 강항 상실감과 귀환에 대한 열망은 모국에 대한 좋은 기억에서 기인한다. 최정아(2009)는 “귀환서사는 민족국가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강화하는 상징적인 의례의 형식이며, 자아의 내면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체계"라고 하였다. 지리적 귀환을 넘어 상징적 의례로서의 귀환은 이들이 인도네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도록 한다. 따라서  귀환서사는 민족주체의 형성과정인 것이다.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린땅이 아버지 디마스의 인도네시아에 대한 그리움을 이식받아 인도네시아로 귀환하기도 하지만 인도네시아인 연인도 린땅이 인도네시아 정착을 결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나라이자 (미래의) 남편의 나라에 정착하여 이성애적 사랑에 충실하고 재생산 질서에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98년 이후 신질서기에 마침표를 찍은 인도네시아는 자유와 정의를 회복하여 주체적인 남성으로 상징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린땅의 인도네시아 정착이 성공함으로써 아버지 디마스 역시 인도네시아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만난 알람과 프랑스에 있는 연인 나라 사이에서 린땅의 선택이 명확히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디아스포라 2세대였던 린땅이 알람과의 사랑을 위해 자카르타로 이주하는 순간 민족적 역이주(Ethnic return migration)의 서사가 완성된다. 민족적 조국과 태생의 조국이 다른 디아스포라 2세대가 부모의 종족적 조국으로 역이주하는 것이다. 린땅의 이름 lintang utara는 인도네시아어로 북위도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또한 lintang 이라는 이름 자체는 영어로 cross(가로지르다, 건너다)의 뜻을 가진다. 파리가 있는 북위도 지역에 있던 린땅이 인도네시아가 있는 적도지역으로 건너간다는 서사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Kenanga는 동남아시아 지역이 원산지이자 독특한 향 때문에 사랑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일랑일랑 꽃을 뜻한다. Bulan 은 달, 월의 의미로서 어떠한 기간을 의미한다. Alam 은 자연을 의미한다. 디마스와 수르띠의 사랑의 상징이었던 kenanga, bulan, alam의 이름은 그들의 사랑이 오랜 기간에도 변하지 않고 자연의 법칙을 따른다는 의미를 갖는다. 나라에 대한 배신을 거쳐 완전해지는 린땅과 알람의 사랑은 인도네시아에 잔존해있는 디마스의 사랑을 대리자인 린땅이 운반하여 결실을 맺는 역할을 한다. 세대를 거쳐 반복되는 사랑과 배신의 비극은 경계인의 운명인 것처럼 느껴진다.  


 위와 같은 귀환이주 서사의 완정을 위해서는 디마스의 정체성과 린땅의 정체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디마스는 반복적으로 파리가 아닌 자카르타의 까릇(Karet)묘지에 묻히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죽어서라도 모국인 인도네시아로 돌아가고 싶다는 강력한 열망을 지녔다. 그는 죽을때까지 인도네시아인으로 살고싶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인도네시아에 다시 돌아가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4년 마다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인도네시아에 입국하기 위한 관광비자 신청을 하지만 매번 거절당한다. 대사관에서는 절대로 공식적인 거절의 이유를 알려주거나 설명해주지 않는다. 프랑스 여권을 가지고 파리에 살고 있지만 인도네시아의 영구 정치적 추방자 신분인 디마스는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때문에 그는 스스로도 매번 정체성의 파열과 위기를 겪어왔다. 반복되는 비자신청 거절에 그는 매번 같은 좌절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 상황을 비록 인도네시아 정부가 자신을 거절했지만 모국인 인도네시아가 자신을 거절한 것은 아니라고 굳게 믿는다.  


 이런 디마스에게 모국인 인도네시아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이는 집(home) 에 대한 비비안과 디마스의 대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비비안은 “집은 당신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에요(Home is where your family lives ; pp.214)” 라고 말하자 디마스는 “집은 내가 집이라고 느끼는 곳이에요(Home is the place where I feel I am at home)”라고 대답한다. 정착국에 충성심과 소속감을 보이지 않는 디마스는 프랑스인 아내와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디마스의 집과 모국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인도네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유별난 것이다. 같은 역사적 경험을 공유했던 디마스의 친구들은 모국에 일어난 비극에 대해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유일하게 끝까지 인도네시아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디마스와 달리 누그르호(Nugroho)는 파리를 두 번째 집으로 받아들였고 트야이(Tjai)는 인도네시아를 방문하고 싶지만 영원히 거주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리사프(Risjaf)는 비자를 얻는데 성공했지만 가족들이 있는 파리를 집으로 느낀다.  사실, 디아스포라 구성원에게 현지에서 적응할 수 있는 가장 쉽고 빠른 전략은 현지인과의 결혼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유일하게 프랑스 여성과 결혼한 디마스는 파리에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럼에도 디마스는 이혼을 맞으며 파리의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는다. 


 디마스의 딸인 린땅은 정체성의 변화를 겪는다. 린땅은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들을 묘사하며 그들은 두개의 고국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지도 교수인 뒤퐁교수는 “너도 모국(homeland)이 두개야”라고 말하며 아버지의 모국이자 린땅의 다른 정체성을 찾을 것을 종용한다. 린땅은 자신에게 인도네시아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오래전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었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이혼 후 프랑스인 어머니와 살았던 린땅은 그동안 인도네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 없이 프랑스인으로서 살아왔다. 그녀는 조상의 모국(ancestral homeland) 혹은 종족적 모국(ethnic homeland)과 태생의 모국(natal homeland)이 같지 않은 디아스포라 2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국적 또한 프랑스이다. 인도네시아는 그저 지도에 있는 이름일 뿐이며 한 번도 방문해본 적 없는 신비로운 곳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들을 통해서만 인도네시아에 대해 전해들었고 이국적이며 아름답지만 의견의 차이로 자국의 시민을 한번에 짓밟을 수도 있는 부정적 이미지를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한편, 린땅은 다른 인도네시아인과 프랑스인 국제 결혼 가정에서 태어난 나라(Nara)와 가까워진다. 아마도 인도네시아인과 프랑스인 부모님이라는 공통점 때문에 끌림을 느꼈을 것이다. 언제나 마음 한켠에, 비록 그것이 인도네시아의 공식 역사에서 삭제된 정치적 격변과 함께 연상될 지라도, 자바와 발리, 라마야나, 가믈란, 끄바야, 루왁커피 등 인도네시아와 관련된 것들에 대해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린땅은 자라면서 다른 혼혈 가정의 아이들은 부모님 양쪽의 나라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음을 본다. 그리고 린땅의 가족과 다른 가족의 차이는 국제결혼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드라마로 얼룩진 아버지의 과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특히 같은 프랑스인과 인도네시아인 국제결혼 가정의 2세대인 나라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나라의 가족은 파리에 살지만 자유롭게 인도네시아를 오고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린땅은 ”...나라와 그의 부모님은 자유롭게 인도네시아를 왔다갔다 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차이점이었다. 아버지와 그의 세 친구들은 언제나 ‘9월 30일 운동’- 후에 인도네시아 정부에 의해 인도네시아 공산당 소행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라고 불리는 힘에 의해 격퇴되었다.” (the differences between us was that Nara and his parents could go in and out of Indonesia freely, while Ayah and his three friends would always be repulsed by a force called the “September 30 Movement”-to which Indonesian government had later come to affix the phrase “of the Indonesian Communist Party” ; pp.161)”라고 표현한다. 린땅의 아버지와 친구들은 항상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소행이라고 연결지은 9월 30일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인도네시아로 돌아갈 수 없는 처지다. 대사관에서 초청한 자바니즈 댄서였던 어머니와 프랑스인 사진작가 아버지인 나라의 부모님은 그 만남에서부터 대사관으로 대변되는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 정부의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린땅은 추방자 신분이자 인도네시아에 강한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아버지로 인해 항상 가정에서 불확실성과 결핍의 느낌을 가졌다. 린땅이 정체성에 관한 혼란을 느끼는 과정에서 나라가 가진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 나라에 대한 사랑처럼 느껴졌을 수 있다. 디마스가 나라가 왜 좋으냐고 묻자 린땅이 무의식적으로 나라의 가족에 대해 얘기한다. 이는 디마스의 대답 “내가 물은 건 그가 좋은 이유지, 그의 가족이 좋은 이유가 아니야(is what you like about him, not about his family)”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버지 디마스가 느낀 잃어버린 것에 대한 갈망은 이처럼 다음 세대로 이식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식의 작업은 자연스럽게 발생한 것이 아니다. 디마스는 린땅이 어렸을 때 부터 라마야나, 마하바라타 같은 인도네시아에서 유명한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들려준다. 후에 린땅은 이것이 자신을 인도네시아와 가깝게 느끼게 하려는 아버지만의 방식이었음을 깨닫는다. 린땅은 라마야나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로 Panji Seirang을 꼽는데 그 캐릭터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나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는 마치 뒤퐁 교수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신 안의 인도네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달을 때와 같다. 린땅(Lintang)이라는 전혀 프랑스적이지 않은 이름을 가진 린땅은 분명 프랑스인으로 살면서도 내면의 균열을 조금씩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디마스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인 인도네시아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디마스의 부인이자 린땅의 어머니인 비비안 역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딸인 린땅에게 어릴때부터 프랑스어 뿐만 아니라 영어와 인도네시아를 가르쳐 다가올 미래에 대비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부모로부터 세대를 통해 전해진 열망의 이식과 정체성의 형성과정을 겪은 린땅에게 비록 프랑스와 인도네시아인 혼혈이지만 나라는 상대적으로 ‘타자’인 평범한 프랑스인으로 느껴졌던 것으로 보인다. 린땅은 나라에 대해 “전형적인 프랑스인처럼, 나라는 대부분 미국에 관한 것에 대해 냉소적이었다(Being typically French, Nara was cynical about most Amerian things.; pp. 158)”라고 말한다. 또한 나라가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외국인들이 떠나고 있는 인도네시아로 들어오겠다고 하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는다. 이때 나라의 대답인 “넌 나도 인도네시아인이라는 걸 잊어버렸니?!(Are you forgetting that I am Indonesian too; pp.470)?!”는 린땅이 그를 인도네시아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좀 더 명확히 보여준다.     


4.2    『중상모략』 (Slander)에서 고향의식 : 근친상간적인 고향과 제3의 공간 모색


  『중상모략』 (Slander)의 주인공들의 고향의식은 작가인 린다레가 고향과의 관계를 상상하는 방법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린다레는 본인과 베트남을 죽은 쌍둥이 형제로서 묘사한다. “내 고향을, 나는 젊은 농부가 자기 쌍둥이의 태아를 운반하는 방식으로 운반합니다. 그것은 괴물 같은 유대입니다.  모국과 쌍둥이가 누에고치화되고 질식하고, 인지되고 거부되는 유대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가 죽은 아이처럼 운반됩니다.” (My homeland, I carry it in the way that that young peasant carried the fetus of his twin. It's a monstrous bond. A bond where the homeland, the twin, is cocooned and suffocated, recognized and denied. And finally carried as one does a dead child.) 근친상간적이거나 괴물같은 관련성, 이것이 린다레의 그녀와 모국의 관계를 정의하는 방식이다. 흥미롭게도 린다레는 주로 어린 베트남 이민자들에 관한 인물들을 묘사할때 근친상간 모티브를 등장시켜왔다. 테스도(2005)가 주장하듯이, 린다레의 작업에서 근친상간은 모든 망명, 분리, 상실, 후회, 외로움등의 관점을 가지며 망명된 자, 회귀, 재결합, 소속감, 온전함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 이때 형제자매의 근친상간은 향수가 일종의 나르시시즘에 대한 선언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형제자매의 근친상간은 잃어버린 결속을 다시 만들 수 있다는 희망속에 어머니의 자궁과 어린시절로 후퇴하려는 시도이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고 누렸던 파라다이스이다. 린다레 역시 사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 잃어버린 파라다이스를 찾고있는데, 바로 베트남에서의 어린시절이다. 그러나 이 파라다이스는 파열의 신호로 가득하다. 린다레에게 베트남은 쌍둥이 형제로서, 결합과 상실을 모두 상징한다. 꿈 속의 땅이자 분단되지 않은 조상의 땅이지만 한편으로, 전쟁과 죽음의 땅이고 위도 17도에서 분단된 나라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자궁으로의 심리적 후퇴나 고국으로의 귀환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망명을 강요당한 쌍둥이의 운명이기도 하다. 『중상모략』 (Slander)에는 형제자매간의 근친상과과 삼촌 조카의 근친상간으로 총 2번의 근친상간이 등장한다. 첫번째 근친상간은 유교적 가치와 조국에 대한 저항이자 외적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두번째 근친상간은 조카인 여자주인공이 아버지상(father figure), 나아가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찾으려는 여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근친상간적 관계를 통해 베트남 출신의 이민자들은 첫째로는 금기를 깨뜨려 베트남적 가족 내 위계질서와 부모의 권위에 도전하고 둘째로는 서로를 통해 감정적, 영적, 성적으로 오로지 민족적 배경에 기반한 배타적 유대감을 형성한다. 이것은 나아가, 서구사회로의 통합을 거절한다. 따라서 린다레의 작품 속에서 근친상간 모티브는 어린 베트남계 이민자들의 감정과 욕망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 테스도(Tess Do, 2005)는 자신의 글 “From Incest to Exile: Linda Le and Incestuous Vietnamese Immigrants”에서 근친상간의 어원을 파헤치며 근친상간의 다양한 함의를 주장한다. 프랑스어 사전에서 근친상간은 법적측면, 섹슈얼리티, 결혼과 사랑의 측면에서 정의된다고 한다. 이에 견주어, 근친상간(Incest)을 베트남어로는 loạn luân 혹은 loạn dâm 로 찾을 수 있는데 “관습이나 법에 위반하여, 일가 사이의 남녀가 성적 관계를 맺음"이라고 정의한다. 이때, loạn 은 격변, 장애, 혼란, 반란 을 뜻한다. 근친상간이라는 단어를 선택할 때, luân으로 사회의 도덕적 질서를, dâm 으로 섹슈얼리티를 강조한다. 결국, 근친상간은 남성에게는 왕-스승-아버지로, 여성에게는 아버지-남편-아들을 대상으로 부여되는 효의 의무 혹은 유교적 사고관에서 기반한 반사회적 행동, 사회질서의 위협을 상징한다. 서구의 사고관에서 일반적으로 “형제자매 사이의 근친상간은 가장 흔한 타입이며, 이 경우에는 보통 성적 놀이의 연장선으로 세대 간 경계를 넘지 않기 때문에 그 결과가 덜 해롭다"고 여기는 것에 비해, 린다레의 작품 속에서는 훨씬 더 심각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여자 형제의 살을 뚫는 다는 것은 단순히 근친상간 금기를 깨는 것이 아니라 베트남 유교적 가족구조의 기본을 이루는 아버지의 권위가 끝났음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베트남어에서 관용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에서도 나타난다. 중국 영향을 받은 베트남어에서 부모라는 뜻의 phụ huynh(한국어로는 학부형)은 단어 그대로 “아버지"와 “장남"을 뜻한다. 그래서 가족내 아버지의 대리인인 장남의 근친상간은 효의 의무라는 관념과 아버지의 우월적 권위를 모두 위협한다. 유교주의적 가족 위계에서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결혼하지 않은 딸은 아버지의 직접적인 권위 아래에 남아있는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는 그 권위가 어머니가 아닌 가장 나이많은 남자형제에게 위임되기 때문이다. 


 삼촌과 삼촌의 여자형제의 근친상간도 이에 해당했다. 삼촌과 여자형제의 사랑은 절대로 행복, 자녀, 따뜻한 저녁을 형성할 수 없고 오직 죽음으로 이끌 뿐이다. 질서와 권위에 복종하기를 거부한 이들은 집을 형성할 수 없는 쓸모없는 투자, 불임의 사랑을 하는 것이다. 가부장적 가족질서 속에서 근친상간을 한 삼촌은 다시 엄격하고 좁은 길로 돌아오길 요구 당했지만 여자형제는 구원받을 수 없었다. 여자형제는 스스로 형제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미쳤다고 생각했고 운명은 그녀를 버렸다. 더렵혀진 여성은 폐기되기 때문이다. 반면, 세상은 삼촌에게 계속 살아가도록 강요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는 한손에 여행가방을 들고서 끊임없이 자기발로 정신병원으로 갔다. (The world demanded that he let himself live but the uncle refused to let himself live, he continued going to the madhouse, his little suitcase in hand. ; pp. 75)  결국 삼촌과 여자형제가 사랑을 속삭이던 작은 방은 삼촌이 떠난 후에 그녀가 죽음을 맞는 장소가 된다. 그러나 여자형제는 가족이 그녀에게 내린 처벌, 죽음을 받아들였고 심지어 기다렸다.(They said to her, Your love will be punished by death. On her knees, she awaited the sentence. ; pp. 73) 죽음 이후에도 여자형제는 썩은 꽃 냄새를 집에 남겼고 그 냄새는 그녀의 죽음과 삼촌의 광기를 가족들이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 


 두번째 근친상간에서, 여자주인공인 조카의 아버지를 찾으려는 노력은 곧 자신의 뿌리, 나아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여정이었다. 근친상간 상대인 삼촌이 기억하는 어릴적 조카의 모습은 “아버지가 그녀 삶의 중요한 문제였다.” (The father, the great affair of her life. p.4) 삼촌은 그녀에게 아버지라는 존재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메우려는 그녀의 노력은 그녀의 출생의 비밀과도 관련있다. 사실 여자 주인공의 어머니는 남편이 아닌, 잠시 왔다 떠난 낯선 외국인과의 사이에서 여주인공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사랑의 증인이 바로 삼촌인 것이다. 여주인공 엄마의 두 연인은 여주인공의 생물학적인 아빠인 낯선 사람과 자신의 동생, 삼촌이다. 그녀 역시 어린시절부터 본인도 삼촌처럼 정상적인 삶의 경계에 위치한다고 느꼈다. 삼촌만이 가족 중 그녀가 유일하게 혈연이라 느낀 사람이었다. 

 마침내 그녀 역시 어머니가 사랑한 어머니의 남자형제에게 유대감을 넘어 사랑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그녀가 따르던 프랑스인 Ricin은  경멸스러운 외국인, 거무스름한 야만인, 경계인으로 남아있기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Keep on being a meteque, a swarthy barbarian. pp.23) 또한 제화공을 피하라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제화공이 그녀를 베트남어를 다시 배우고, 나라를 떠나온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도록 만들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더 강조하는 것은 제화공은 그녀가 갈망하던 그녀의 아버지 혹은 그녀가 언제나 강한 유대감을 느껴온 그녀의 삼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녀가 느끼는 이끌림이 그녀의 아버지와 삼촌에 대한 그리움의 오역일 뿐이라고 말한다. 


 어머니가 불가능한 사랑을 나눴던 자신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프랑스에서 더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유창한 프랑스어에도 불구하고, 인종적으로 그녀는 언제나 ‘우리' 안의 ‘우리 아닌 자들'로 남아야했다. 삼촌과의 만남이후 그녀의 인종은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그녀는 이제 스스로가 거무스름한 이방인임을 인정하였는데 그녀가 혼혈이라는 의혹조차 밝히길 원했다. 그녀는 혼혈이었다. “ (To the pride of being a meteque, a swarthy foreigner, writing in a language that is not her own, she wants to add the suspicion of illegitimacy, her semi-certainty that she is of mixed blood. ; pp.106) 또한 그녀는 삼촌이 자신의 광기의 치료제라고 여겼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던 그녀는 두더지처럼 내면의 향수를 파고들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누가 그녀의 아버지인지, 누가 그녀의 삶을 시작하도록 했는지 묻는 것을 그만둔다. 그녀의 아버지들은 그녀의 삶에 매질만을 주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아버지는 국제적인 성을, 두번째 아버지는 그의 성을 주었을 뿐이다. 마침 상담사는 그녀에게 Ricin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상담사는 그의 존재를 폭로한다. “그는 여주인공에게 완전한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해 삼촌과 같은 다른 사람들을 경계하고 스스로를 그녀의 형제로 자처했다. 그러나 그는 중상모략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He does his little number as the virtuoso of slander and you admire him. He created a void around you so as to have full domination over you. He calls himself your brother. He behaves like your conscience’s pimp. pp.112) 아마도 그녀의 생물학적 아버지, 그 외국인은 프랑스인일 것으로 예상되지만 결국 베트남도, 프랑스도 그녀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모국에 대한 향수를 이식받고 인도네시아에서 연인을 만나 그곳에 정착을 하며 귀환이주 서사를 완정하는 린땅에 비교할때 <Slander>의 여자 주인공은 돌아갈 곳이 없다. 그녀는 스스로 모국을 떠나왔고 연인이었던 삼촌 역시 모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생물학적 아버지의 나라는 그녀를 환영해주지 않았고 그녀가 의지하던 프랑스인은 중상모략자에 불과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이어 제3의 공간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삼촌이 묘사하길, “그녀와 나, 우리는 광기의 족보에서 한 배에서 태어난 새끼들 중 가장 나약한 자들이다. 우리는 유일하게 그 가족에서 탈출해 도망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구원받는 대신에 우리는 정상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났다.”(We are, she and I, the runts of the litter in this family of crazies. We were the only ones to escape, to flee from the family; instead of being saved, we turned out to be incapable of leading a normal life. ; p. 9) 왜냐하면 여주인공이 삼촌에게 쓰는 편지에서도 나타나듯이, 그녀는 그녀 몸의 모든 세균들을 쫓아내고, 영혼을 깨끗이 닦고, 머리 속에서 쓰라린 유머를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가족들로부터 치유되어야만 했다. 그녀에게 가족은 완치되지 않은 어린시절의 질병이었고, 그 여파로 그녀의 젊은 시절이 망가졌다. 이제 그녀는 비록 썩어 없어지거나 추락하더라도 그녀는 스스로의 잘못과 스스로의 의지로 혼자서 결과를 감당하기를 바랬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은 많은 것을 암시한다. 갈림길에서 여자 주인공은  Ricin이 아닌 제화공의 소유로 생각되는 개를 따라 다른 길로 간다. 제화공의 개를 따라갔다는 뜻은 그녀가 프랑스가 아닌 베트남을 선택했다거나, 개 혹은 삼촌에게 끌려다닌다는 뜻이 아니다. 남성인 Ricin의 영향력 아래에서 삼촌이라는 다른 남성의 영향력에 굴복했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은 여자 주인공이다. “나는 떠난다(I am leaving)". 그녀는 드디어 주체적으로 이 아파트를, 거리를, 이 이웃을 떠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명확히 언급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가 가는 길은 누군가가 이미 개척해 놓은, 이름이 있는 곳이 아니라 그녀 스스로 개척해나가야만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이상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제화공이라는 이름에서 암시하듯이, 동포이자 삼촌이자 연인이던 제화공은 그녀의 신발을 고쳐 그녀가 스스로 앞을 향해 걸어갈 수 있도록 해준 것이다.     


떠나는 그녀의 귀에는 계속 다음과 같은 노래가 맴돈다.     

You can’t go home again. 너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I’m a stranger here, 난 여기서 이방인이지.

I’m a stranger everywhere, 난 어디서나 이방인이야.

I would go home, but    난 집으로 갈꺼야, 그러나

I’m a stranger there.    난 거기서 이방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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