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때 살던 신사동 빌라는 방이 세 개는 되었다. 큰 방에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안방에는 엄마와 아빠, 작은방에는 여동생과 내가, 그리고 발코니에는 항상 내 가슴 아래 높이의 하얀 바구니가 있었다. 버려졌지만,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게 닦인 쓰레기들이 담겨있었다. 페트병 표면에 자글자글한 흠집을 알아채지 못한다면 버려진지도 모를 만큼 그것들은 깨끗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바구니 옆에 큰 연필꽂이 안에는 항상 가위와 풀, 자, 스카치테이프가 비치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다 괴짜 아들을 위한 엄마의 배려였다. 아무 때나 내키는 대로 나는 그것들을 집어 들고 자르고 붙였다. 주로 만들어지는 것들은 새로운 세상을 탐험하거나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페트병 추진기가 5개나 달린 로켓이나, 지관 대포를 단 탱크 등이었다. 내 머릿속에서는 매일 악의 세력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먼 우주 한복판으로의 모험이 펼쳐졌다.
그리고 몇 년 뒤 우리는 이사를 갔다. 천안 삼거리 근처 논밭 한가운데 우뚝 선 아파트 단지였다. 5층 이상만 되어도 복도에서 독립기념관이 보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만 집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엄마에게는 더 이상 아들이 갖고 놀 재활용 쓰레기들을 씻고 말릴 여유가 없었다. 아들은 발코니에서의 시간보다는 바깥에서의 시간이 많아졌고, 친구 여럿이 생겼고 집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점점 싫어졌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을 보내는 동안 총 2번의 이사를 했는데, 두 번째가 인천이었다. 인천 집은 다 부서져 가는 빌라 6층에 위치했고, 그 집에는 발코니 자체가 없었다. 새로운 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만나는 것이 익숙했던 나는 첫날부터 친해진 친구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문을 여는 순간 엄마는 아직 채 풀지 못한 이삿짐 박스 사이에서 바닥을 걸레로 훔치고 있었다. 엄마는 지친 눈으로 친구들을 데리고 돌아가라고 말했다. 나는 그 눈을 바라보면서 대답하기가 겁이 났다. 눈길을 피하며 알겠다고 말하고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좁은 계단에 한 줄로 늘어서 내 대답을 기다리던 친구들은 금방 상황을 받아들이고 몸을 돌려 차례차례 내려갔다. 그리고 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상황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은 다시 방이 3개 있는 집에 산다. 거실엔 엄마가 있고, 공부방에는 내가 있고, 작은방을 쓰던 동생은 결혼해 나가고 없다. 그리고 발코니에는 재활용 쓰레기가 있다. 깨끗하게 닦여있지도, 다듬어져 있지도 않다. 매주 재활용 버리는 날을 기다리며, 일주일 동안 그냥 쓰레기로서 버려질 날을 기다린다. 아들은 재활용 대신 글을 쓰고 잘라 붙이고, PPT를 잘라 붙이고, 영상을 잘라 붙인다. 잘라 붙이는 일 중에 '돈이 되는'일을 찾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적어도 예전엔 무엇을 잘라 붙이기만 해도 즐거웠는데, 이제는 그런 즐거움 대신 잘라 붙이기만 해도 쉬고 싶다. 아파트의 쓰레기 버리는 날이 돌아오면 나는 발코니의 쓰레기들을 집어 들고나가 서슴없이 그것들을 버린다. 초록색 인쇄가 다 지워진 흰색 낡은 마대자루에 페트병이니, 잡병, 종이 쪼가리들이 버려진다. 그러다 예쁜 잡병이 눈에 띈다. 물에 헹궈서 잘 닦아 말리면 왠지 쓸 일이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버린 페트병도 쓸만해 보이는데. 잠시 머릿속으로 잘라 붙이는 상상을 한다. 금방 멋진 우주선 하나가 이륙할 것만 같다. 오늘은 우주괴물과 싸워 지구를 지킬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어서 오늘의 하루가 다 갔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몇 시간 후면 자야 한다. 그래야 내일 또 무얼 잘라 붙여 돈을 번다.
그래, 일단 잠을 자야 하니까.
쓰레기장을 뒤로하고 아파트 5-6호라인 현관으로 걸어온다. 우주선은 다음에, 다음에 만들기로 한다. 다음 주에도 재활용품은 많이 쌓일테니까.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올라가고 싶습니다'라는 뜻의 화살촉 모양 버튼을 누른다. 빨간색 불빛이 '17'이라고 쓰여있다. 천천히 숫자가 떨어진다. 18. 17. 16. 15.. 숫자가 또 멈춘다. 한참 후에 다시 떨어진다. 14. 13. 12. 11. 다시 멈춘다. 이번엔 그전보다 조금 더 오래 멈춘다. 그러고 보면 요새 쉬운일이 하나 없다. 나는 또다시 발코니에 앉아 재활용 잘라붙이던 행위를 생각한다. 예전엔 즐거웠지만 이제는 즐겁지 않은 것들이 점점 많아지고, 다시 그리워지기를 반복한다. 그냥 나이탓을 해야지. 머리가 늙었나보다 해야지. 자꾸만 감상에 몸이 젖어 무거워진다. 얇은 달이 눈썹처럼 뜬 저녁. 엘리베이터도 미래도 멀게만 느껴지는 이런 저녁에. 또 해묵은 아쉬움들을 꺼내 만지작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