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기록은 좋지 않아도 꼬박꼬박 참고 잘 뛰었는데 이날은 의지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첫 완주 실패 기록
동아일보 2019 공주 백제 마라톤 대회
지난 대회 후 2주간 한 번도 뛰질 않았다
건강상의 문제로 그냥 쉬는 쪽을 택했는데 이게 아주 나빴다고 생각되고 후회가 컸다
내륙의 지방 대회는 처음이고 동아일보 주최 대회라니 서울의 동마를 떠올리며 기대에 부풀었었다
비록 서울의 대회에선 10km를 완주했을 뿐이지만 올해 동아일보에서 주최하는 3대 대회를 모두 완주 시 수여한다는 런저니 메달에 완전 꽂혀있기도 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참가 신청을 했었다
종목은 앞으로도 꾸준히 달리고 싶은 풀코스
이게 패인이었다
하프로 내릴걸 욕심이 과했다는 후회가 되지만 다시 신청 당시로 돌아가도 나는 풀코스에 손을 얹었을 테니 이런 무의미한 후회는 집어넣기로 한다
사실 잘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2주 전 대회를 워낙 재밌게 뛰었고 완주의 흥분이 아직 남아있어 자신감은 충분했다
영종도 우리 집에서 대회가 열리는 공주까지의 거리가 애매했다
숙박을 잡을지 집에서 일찍 출발할지 계속 고민하다가 집에서 출발하기로 하고 거기에 맞춰 준비했다
새벽 2시 기상
전날은 태풍 '링링'으로 인천이 초토화됐었기도 해 한번터면 대회에도 못 갈 뻔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어제까진 통행이 불가했던 인천대교를 건너 새벽 마라톤 여행을 시작했다
캄캄한 새벽의 고속도로를 달린다
이때까진 실패의 기운이라곤 1도 없어 그저 기분이 좋기만 했다
대회에 영향을 줄까 봐 그 좋아하는 고속도로 휴게소의 우동도 마다했다
(그냥 먹을걸)
공주 IC를 나오니 대회를 알리는 여러 간판과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내가 공주 땅을 밟는 날이 오다니감동이다
규모는 작았지만 운동장 분위기도 뭐랄까 지방의 재밌는 행사를 보는 느낌이고 내리던 비도 그쳤고 시작 전엔 이렇듯 다 좋았다
게다가 내가 못 뛸 거란 생각은 꿈에도 없었기 때문에 다섯 시간 가까이 달릴 수 있는 기합을 마음에 불어넣고 평소 좋아하는 위치를 찾아 출발 준비를 했다
오늘의 사회자는 마라톤 행사의 최강자, 배동성 아저씨
이 분의 이전 멘트 중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데
"저는 오늘도 여러분 덕에 먹고삽니다. 얼마나 고마운지요"
(재밌는 분이다)
스트레칭을 맡은 팀은 기아 타이거즈 치어리더팀
(공주랑 기아가 뭔 연관이 있나 잠깐 생각해봤지만 잘 모르겠다)
대회 시작시간이 되어 출발선에 섰다
손에 식은땀이 나고 긴장돼서 심하게 두근거린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시작 전에는 늘 이랬던 것 같다
'무사히 잘 뛰게해 주세요'
지난 대회에서 얻은 무릎 통증 때문에 마음이 움츠러든 상태라 완주까지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컸다
마라톤 동호회나 팀 별 단체복의 뒤를 보는 게 재밌는데 이번 대회에선 평소 못 보던 지역이 많아 공주가 남부, 중부의 딱 가운데구나라는 실감이 들었다
김해, 구미, 대구지역의 팀 이름들이 보였고 전반적으로 연령대도 높았으며 오래 준비한 탄탄한 실력을 뿜어내는 포스에 살짝 기가 죽기도 했다
불과 2주 전의 어마어마한 인파 속에 달렸던 펀 런의 잔상이 아직 남아 있던 터에이 대회의 분위기는 내겐 너무 비장하고 진지하기까지 했다
역시 실력이 부족하다 보니 분위기에 주눅이 드나 싶었다
아쉬웠던 건 풀코스 참가자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인데 마라톤이 결국 자기만의 달리기이고 자신과의 싸움이라고는 해도 좀 더 다양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달렸다면 의지가 되고 힘이 나지 않았을까 (라는 완주 실패자의 변명이었습니다)
드디어 출발
'공주까지 왔으니 잘 달려보자 ''
대회장을 힘 있게 달려 빠져나갔다
다행히 오락가락하던 비도 그쳤고 기온과 별개로 흐린 날씨라 운이 좋다고 생각했었다
'주변 분위기에 휘둘리지 말고 페이스를 지키자
어차피 목표는 5시간 내 완주이니 서두를 것 없다'
계속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공주까지 달리러 온 풀코스 주자들은 나와 다른 우주의 러너들인지 휙휙 쌩하니 내 옆을 스쳐 멀어져 갔다
'이렇게 되면 또 꼴찌로 혼자 달리겠는데'
얼마 안 되는 풀코스 주자들에 이어 하프 참가자들이 이내 섞여 들어왔다
그래도 이쪽은 참가자들이 좀 있는 편이라 아직까지 길에 혼자 남는 대참사는 면했다
처음 달리는 길, 시골길, 한적하고 좁으며 울퉁불퉁한 길
달리는 거리가 늘어나면서 슬슬 열이 차오르고 땀이 주룩 흐르는 와중에 처음엔 의식되지 않았던 습도의 공포가 덮쳐왔다
태풍 끝이라지만 기온이 높았고 공기 중의 습기를 몸이 빨아들이는 듯 축축 처지며 호흡이 가빠졌다
진정해보려 했지만 과호흡으로 쓰러질 것 같아 10km도 못가 발을 풀고 진정시켜야 했다
'죽는 거 아냐? 이런 논두렁에 굴러서?'
10km를 어떻게 채웠는지 모르겠다
워낙 뒤처져서 굉장히 못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평소처럼 1시간이 조금 안 되는 아슬아슬한 기록으로 통과한 것을 보니 엄살이 심했었나 보다고 나중에 뒤늦은 반성이 됐다
챙겨 온 파워젤을 입에 물고 정신 차리라고 나를 채찍질했다
간식대에서 작은 바나나도 하나 주워 먹었다
초코파이도 준댔는데 앞서 달려간 주자들이 다 먹고 빈 껍질뿐이라 조금 실망했다
(역시 번거로워도 내 간식은 내가 챙겨가야겠어!)
10km를 지난 후 딱 1km를 더 가 다시 달리기를 멈추고 숨을 가다듬었다
슬슬 일찍 포기한 주자들이 눈에 들어오고 그들을 태워가기 위한 차량도 보였다
당장 기어가
"저도요, 저도 좀 데려가 주세요"
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만두는 상상을 하는 사이 나도 모르게 12, 13, 14km를 지나고 있었다
역시 무의식의 세계가 무섭다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보다 더 두려운 현실
해가.. 해가 난다
쨍하게 해가 고개를 내미니 온 대지의 습기가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듯 숨이 턱턱 막혀왔다
이번 대회는 정말 망했구나
내 몸을 쥐어짜면 물이 뚝뚝 흐를지도 모른다
페이스가 떨어지면서 멈춰 서버리는 횟수도 빈번해졌다
'그만 뛰자'
나는 달리기를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다만 하프와 풀의 코스가 같아 하프코스로는 완주가 가능하다는 것까진 머리에 남아있어 포기 대신 반쪽짜리 완주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아무리 하프라도 21km가 쉬운 거리가 아니며 뭐가 됐든 일단 달려야 끝을 낼 수 있다
달렸다
달리다 보니 금강이 보인다
여기가 말로만 듣던 그 금강이구나
(이런 추레한 마음으로 만나게 되어 부끄럽습니다)
내가 뒤로 처지긴 했지만 그래도 하프 주자들과 섞여있다 보니 적은 인원이 아니었는데 달리다 강제로 멈춰서는 일을 그 짧은 사이 두 번이나 겪었다
교통통제
차량이 지나가는 사이 잠시 멈춰 기다렸어야 했는데 솔직히 이게 뭔가 싶었다
지방 대회라지만 동아마라톤인데!
쓰러질 것 같다 했지만 쓰러지진 않았던 이 엄살쟁이와 달리 정말 쓰러진 사람도 봤다
'나만 힘든 게 아니라 다들 나름의 부침을 겪으며 함께 길에 서있다'라는 당연한 깨달음을 얻은 순간이기도 했다
달리던 중 마지막 갈림길에 섰다
그대로 쭉 달려가면 풀코스이고 왼쪽으로 꺾어 1km 정도를 더 달리면 대회장이다
아주 잠깐 그냥 가자는 생각도 했었지만 결국 쉬고 싶은 의지가 내 발목을 대회장 쪽으로 돌려세웠다
일찍 완주를 마친 10km 부분 참가자들과 이른 골인에 성공한 하프 주자들이 메달을 목에 걸고 성취감에 취한 빛나는 표정으로 경기장 주변을 메우고 있는 가운데 나는 완주 실패자로 하프코스만큼만 완주한 채 이 대회를 마쳤다
남편에게 욕이란 욕은 다 먹고 잔소리도 엄청 들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그 먼 공주까지 가서 이게 뭐냐, 정신머리가 해이해졌다, 그걸 못 참아 그냥 들어오냐
처음엔 민망했는데 듣다 보니 짜증이 나서 "나도 잘해보고 싶었다고, 도중에 그만둔 내 마음이 어떤지 댁이 아느냐고" 되려 성질을 부렸지만 이내 깨갱하고 내 의지가 부족했음을 시인하며 자책하고 말았다
솔직히 엄청 후회했고 삼사일 정도는 꿈에 공주 대회장이 나올 만큼 충격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간신히 들어오는 정도의 기록이라고는 해도 지금껏 중도 포기는 없었고 내 작은 자부심이었는데 이렇게 깨버리고 나니 머릿속에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내가 왜 그랬을까
너무 낙담하니 이번엔 날 달래준다
달리기를 하다 보면 한 번은 있었을 일이고 지금 겪어 앞으로 잘할 수 있다면 오히려 내게 잘 된 일이라고 길게 보라는 인간다운 충고에 이 사람이 아까 그 사람인가 살짝 의심이 들었지만 내 몰골이 풀코스를 뛰고 났을 때보다 더 안 좋아 보인다고 목욕탕에도 보내주고 완주 후에 먹을 수 있는 국수도 받아다 줬다
(대회장 옆 금강 온천 아주머니가 수고했다고 내년에도 또 만나자는 좋은 인사도 건네주셨다)
국수를 먹는데 지나가던 아저씨가 완주를 못했느냐며 굉장히 하찮게 훑어보셔서 (풀코스 참가가 표기되어 있는) 배번을 확 떼 버리긴 했지만 낙담한 와중에도 국수와 밤 막걸리는 굉장한 꿀맛이어서 집에 오는 길에 밤 막걸리를 사오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