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고 건강하게 살지 않아도 보호자가 됩니다
겨울비가 내린다.
내리는 비가 보일러 배관통에 떨어져 투둑 투둑 소리를 낸다.
밤새도록 내릴 모양으로 쉬지 않고 떨어진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본격적인 겨울 추위가 찾아온다고 한다. 오늘 새벽에는 잘 빨아서 옷장 깊이 숨겨 넣어둔 장갑을 꺼내 꼈다. 이제 주머니에 넣어서 해결될 손 시림이 아닐 추위가 시작된 것이다.
겨울, 11월 끝자락에서 12월로 넘어가는 시점에는 올 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허전한 마음과 내년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막막한 마음이 공존한다. 나는 이 감정을 달래기 위해 매번 내년 시작이 어설프게 사라지지 않도록, 올해를 어영부영 넘기지 않도록 일 하나를 만들어 두었다.
바로 정기검진이다.
12월 말이나 1월에 심장 정기검진 일정을 잡아두면 그 하루 일정을 기점으로 하나씩 하나씩 새로운 일정을 채워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병원에 갔다 오면 거의 다 써서 에너지가 얼마 남지 않은 건전지를 끼워놓은 전자제품처럼 동작과 생각이 작동하다 멈추다 작동하다 멈춘다.
멈추는 때에는 한참을 멍하게 있다가 작동하는 때에는 언제 멈추었던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잘 움직인다. 멈춤이 길지 않기 위해서는 나에게 에너지를 대신하여 즐거움의 연료를 채워줘야 한다. 나에게 주는 선물을 산다거나 엄마와 하루라도 재미있게 보낸다거나 맛있는 것을 사 먹는다거나 하는 일상의 행복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그 멈춤이 절대 오래 지속되지 않도록 일정표에 빽빽하게 계획을 써둔다.
올해와 내년 일정표에는 내 일정과 함께 엄마의 일정까지 끼워 넣었다. 엄마의 일정은 1차 2차 3차로 시작된다. 엄마의 일정은 내게 새로운 칭호를 선물해주었다. 이 칭호를 들으면 나는 절대 멈춰서도 아파서도 안되고 멈춘 적도 아픈 적도 없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엄마의 일정이 내 일상에 들어오면 나를 부르는 “환자분~”이라는 단어가 “보호자분~”이라는 단어로 이동한다.
단어는 이동한다. 아니, 추가된 것이다. 엄마에게 붙었던 단어가 내게도 와서 붙어있다. 건강에 문제가 없을 법한 보호자라는 단어다. 병원에 출입할 수 있도록 보호자증을 받으면 나는 출입 허가를 받음과 동시에 건강해서 환자를 돌보기에 문제가 없다는 평가 결과를 당당히 받아낸 것 같다.
보호자증을 받으면서 내게 붙은 꼬리표가 두 개가 되었다. 동시에 엄마에게도 환자라는 새로운 꼬리표가 생겼다. 꼬리표가 족쇄가 되지 않도록, 내 멈춤에 엄마가 같이 멈추지 않도록 그리고 엄마의 멈춤에 내가 멈추지 않도록. 나는 성실한 환자로 충실한 보호자로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겨울을 나야 한다. 마음에도 월동준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