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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Jul 21. 2024

18년에 걸친 로맨스, 시간을 견뎌내는 ‘비포’ 시리즈

영원을 순간으로 만들기도 하고, 순간을 영원처럼 기록하기도 하는 것. ‘시간 예술’로서 영화가 지닌 매력이다. 현존하는 감독 중 시간이 지닌 이러한 다층적인 면을 가장 깊이 있게 탐구하고 있는 감독은 리처드 링클레이터일 것이다. 미국 텍사스의 오스틴에 사는 청춘들의 24시간을 수다로 풀어낸 장편 데뷔작 <슬래커>(1991)를 비롯한 초기작들에선 하루의 시간에 집중했고, <보이 후드>(2014)에선 한 소년의 12년 성장사를 실제 12년 동안 기록했다.   

  

그리고 그사이,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줄리 델피)의 만남과 이별, 재회와 인생을 18년에 걸쳐 그려낸 ‘비포’ 트롤로지가 있다. <비포 선라이즈>(1995)를 시작으로 9년 간격으로 세상에 나온 <비포 선셋>(2004), <비포 미드나잇>(2013)을 통해 링클레이터는 시간의 마법사로 추대됐다. 영화 속 두 주인공(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의 역사를 지켜보며 함께 나이 들어간 관객들에게도 이 시간은 각별하다. ‘비포’ 시리즈를 본다는 건, 그 시리즈를 보던 당시의 나를 만나는 일과 같다.     


마침, ‘비포’ 시리즈 3부작이 7월17일부터 릴레이로 개봉한다고 해서 추억을 돌려세워 봤다. 제시와 셀린보다 어린 나이에 <비포 선라이즈>를 봤던 나는 이제, <비포 미드나잇> 속 제시와 셀린의 나이대가 됐다. 40대의 눈으로 들춰본 ‘비포’ 시리즈는 어쩜 이렇게 다른 영화 같을까.     


전설의 시작, <비포 선라이즈>     

<비포 선라이즈>는 유럽횡단열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프랑스 여자 셀린과 미국 남자 제시가 비엔나에서 즉흥적으로 내려 거리를 걸으며 ‘해가 떠오를 때까지’ 마음을 나누는 이야기다. 남자와 여자의 상대를 향한 ‘끌림’은 불가항력적이고, 영화는 그러한 설렘과 성적 긴장감을 디테일하게 잡아챘다. 대관람차에서의 첫 키스, 카페에서 전화 놀이를 하며 전한 마음, 무릎베개를 하고 나눈 대화, 그리고 캐스 블룸의 ‘컴 히어(Come Here)’가 흐르는 레코드 가게 좁은 부스 안에서 침을 꼴깍 삼키며 애써 피하던 타오르는 시선들….     


우주가 온 힘을 다해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하는 듯한 느낌을 영화는 어쩜 이렇게도 로맨틱하게 담아낸 걸까. 전 세계 젊은이들이 ‘한여름 밤의 꿈’과도 같은 사랑을 꿈꾸며 유럽행 배낭여행을 시작한 건 영화가 공개된 이 무렵. 열차를 타고 해가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봤자, 제시 같은 남자나 셀린 같은 여자를 만날 일은 요원하다는 사실에 낙담한 것도 이때다.     


스물셋, 그 시절에 제시와 셀린은 눈부셨다. 젊음의 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디로든 흘러갈 수 있다는 자유로움이, 그 희망이 그들을 더 눈부시게 했다. 그리고 그들은 무모하기도 했다. 무슨 배짱으로 전화번호 하나 교환하지 않고 헤어졌을까. “6개월 후, 이곳(비엔나 기차역)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 하나만 덜렁 하고 말이다. SNS로 상대의 신상을 찾아낼 수 있는 시대도 아니었으니, 이 약속은 관객의 마음에도 불안을 드리웠다. 그래서, 그 남자와 그 여자는 6개월 후 재회했을까.     


<비포 선셋>,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이 궁금증이 풀리기까지 무려 9년의 세월이 걸렸다. <비포 선셋>은 작가가 된 제시가 책 홍보를 위해 파리에 오면서 시작된다. 그가 쓴 책 <디스 타임(This Time)>은 9년 전 셀린과의 만남을 토대로 쓰인 소설. 영화는 그런 제시의 소식을 접한 셀린이 낭독회를 찾으면서 관객이 궁금해했던 비밀을 알려준다. 아, 그들은 그때 만나지 못했구나. 이것이 9년 만의 재회구나.     


어느덧 30대가 된 남자와 여자는 ‘해가 지기까지’ 파리의 거리를 걸으며 지나온 시간을 풀어낸다. <비포 선셋>의 특징은 영화 밖 시간과 영화 안 시간이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1편이 그랬듯 그들에게 ‘시간적 제약’을 건다. 몇 시간 후 제시는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 게다가 제시에겐 아내와 아들이, 셀린에게도 동거하는 남자친구가 있다. 자유로웠던 9년 전과 달리 ‘현실적 제약’도 그들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애에서 중요한 건 ‘상황’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가 아니던가. 어떤 상태? 상대에게 마음을 내어줄 준비가 되어 있을 상태. 파리 거리를 걸으며 그들은 서로에게 암호를 던지기 시작한다. 판도라의 상자를 기어코 열고야 만다. “우리의 이야기를 쓰면 언제고 너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제시, “그해 여름엔 희망이 넘쳤는데, 지금은…”이라고 말을 흐리는 셀린, “매번 너의 꿈을 꾸고 울면서 깬다”는 제시, “(9년 전) 그날 밤 내 모든 걸 쏟아부어서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라고 화풀이하고야 마는 셀린.     


철없는 사랑을 할 나이는 지났지만, 그렇다고 무언가를 돌려놓기에 너무 늦은 것도 아닌 나이. 그렇게 불행 올림픽이라도 하듯, 자신은 지금 외롭노라고, 행복하지 않노라고 고백하며 현실 탈출을 위한 ‘정당성’을 확보하고 ‘알리바이’를 찾으려 한다. 링클레이터는 자칫 불륜 드라마로 비칠 수 있는 서사에 현실감과 감성을 적절히 조율하며, 설득력을 획득해 낸다.     


영화 막바지, 아쉬움에 이별을 여러 차례 미룬 두 사람이 기어코 셀린의 집으로 들어선다. 이제 더 이상 이별을 유예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제시는 떠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고, 셀린 역시 붙잡을지 말지를 결단해야 한다. 셀린이 말한다. “그러다 비행기 놓치겠어.” 제시가 답한다. “알아.”     


아니,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알려주지 않고 거기에서 바로 영화를 끝내버리는 고약한 링클레이터. ‘열린 결말’ 앞에서 나는 제시가 비행기를 타지 않았길 바라면서도, 그들의 사랑이 평생 추억으로만 남아도 아름답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링클레이터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비포 미드나잇>, 완벽하진 않지만 실제 삶     

<비포 미드나잇>이라는 이름으로 3편이 나온다고 했을 때, 마음이 좀 복잡했었다. 아름답게 남아 있는 지난 시리즈의 추억을 훼손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라는 피천득의 <인연>이 재현되는 게 아닐까란 의심. 40대가 된 제시와 셀린을 볼 자신이 없기도 했다.     


그렇게 복잡한 마음으로 마주했던 <미포 미드나잇>은 세상에나! 9년의 시간 동안 제시와 셀린이 부부가 됐다니. 쌍둥이 아이까지 둔 학부모라니. 제시의 얼굴에서 움푹 파인 세월의 주름을 발견했을 때, 셀린이 세월의 중력을 못 이긴 가슴을 드러냈을 때, 나는 시간의 야속함을 느끼며 짧게 탄식을 내뱉었던 것 같다. 아, 소멸된 청춘은 어디로.     


낭만이 치사량으로 흘렀던 <비포 선라이즈>, 낭만과 현실이 적절히 섞였던 <비포 선셋>과 달리, <비포 미드나잇>에 큰 비중으로 앉아 있는 건 현실이다. 그리스 남부 도시 펠로폰네소스를 배경으로 그들은 육아와 양육 문제 등을 두고 다툰다. 서로를 갈망하던 열정과 신비는 고대 유적에 낀 시간의 이끼가 된 지 오래. 무엇보다, ‘시간’은 더 이상 그들을 가로막지 않는다. 조여 오는 기차 시간도, 비행기 출발 시간도 없다. 도리어, 이젠 제시와 셀린 사이에 시간이 너무 남는 게 문제다. 많은 부부가 그랬듯, ‘권태’의 위기를 잘 물리쳐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시간이 내린 ‘형벌’일까.     


부부 싸움을 치르고 토라져 있는 셀린을 찾아간 제시가 다정하게 말한다. “진정한 사랑을 원한다면 이게 맞아. 완벽하진 않지만, 실제 삶이니까.” 제시가 건넨 진심에 셀린의 마음이 풀린다. 많은 사람은 ‘가지 않은 길’에 미련을 두고 살아간다. 그러나 진짜는 여기에 있고, 행복해질 수 있는 길 또한 실제의 삶 속에 있다. 제시는 그런 삶의 이치를 외면하지 않는 어른의 나이가 됐고, 셀린은 그런 남자의 말을 곡해 없이 들을 수 있는 나이가 됐다. 하긴, 처음부터 두 사람은 연인 사이에 대화가 통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증명해온 커플이었지.     

‘비포’ 시리즈에 링클레이터만큼이나 큰 지분을 차지하는 건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다. 하나의 캐릭터로 18년을 살았으니, 여러 의미에서 그들에겐 ‘인생작’이라 할 만하다. <비포 선셋> <비포 미드나잇>의 경우엔 두 배우가 작가로도 참여했다. 특히 <비포 미드나잇> 땐 감독과 두 배우가 숙소에 모여 함께 대사를 만들며, 셋 중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는 대사는 탈락시키는 방법을 썼다고 한다. 캐릭터와 배우의 거리감이 밀착되게 느껴진 건, 이러한 협업 덕분이다. 이처럼 ‘비포’ 시리즈는 작품 안팎에서 시간의 파괴력과 무상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세월이 흘러가면서 쌓인 신뢰의 힘을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그녀에게 바칩니다.”(The film is dedicated to her.)”  

   

<비포 미드나잇>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문구다. 그녀는 에이미 레홉트. 링클레이터는 1989년 필라델피아에서 우연히 만난 이 여성과 밤새 대화를 나눴고, 그것이 <비포 선라이즈>의 씨앗이 됐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비포 선라이즈>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 영화는, 시간 안에 오래 머무르지 못한 누군가의 삶을 연장해 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시사저널에 쓴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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