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쿠니 가오니, 요시모토 바나나, 오쿠다 히데오, 츠지 히토나리… 2000년대 초중반 서점을 자주 들락거렸던 사람들이라면, 책꽂이에 하나쯤 꽂혀 있을 일본 작가 이름일 것이다. 일본 소설이 한국 서점가에 몰아치던 시절, 나도 그 분위기에 동참해서 일본 소설을 꽤 많이 읽었었다. 당시 '썸남'에게 받은 책 선물이 있었는데, 츠지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가 하나의 이야기를 남녀의 시선으로 각각 써 내려간 '냉정과 열정 사이'였다. 사랑하다 헤어진 남녀가 8년 후 피렌체 두오모 성당에서 다시 만난다는, 기적 같은 이야기. (선물 받은 다음 날 '썸남'과는 영영 '남남'이 됐기에, 이 책에 대한 기억이 또렷하다.)
'냉정과 열정 사이'는 인기를 타고 2003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다케노우치 유타카와 진혜림 주연의 영화로 말이다. 이별과 재회를 그려나가는 영화엔 낭만이 넘쳤고, 피렌체는 그림 같았고, 배우들은 아름다웠다. 무엇보다 OST가 버릴 곡 하나 없었는데, 지금도 어디선가 수록곡 'History'의 첼로 소리가 흘러나오면 과거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음악은 위대하다.
각설하고. '냉정과 열정 사이'의 잔상이 남아있던 2006년 비슷한 포맷의 소설이 나왔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츠치 히토나리가 남자의 시선으로, 한국 작가 공지영이 여성의 시선으로 쓴 소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다. 한일 수교 40주년을 기념이라는 거창한 기획 이유가 붙었지만, 에이~ 말은 바로 하자. '냉정과 열정 사이' 인기 영향이 컸을 것이다. 잘 만든 기획에 후발 주자가 따르므로. 어쨌든 두 작가가 1년여 동안 1,000여통의 e메일을 주고받으며 완성한 소설은 서점에서 빠르게 팔려나갔다.
앞서 언급했듯 '냉정과 열정 사이'가 영화로 옮겨졌거니와, 공지영 작가 역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도가니' 등 이미 여러 차례 자신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가이기에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의 영상화는 언제 성사된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게 없는 프로젝트였다. 다만 한-일 양국 배우를 주연으로 캐스팅해야 한다는 미션이 허들로 작용했을 텐데, 멜로는 배우의 매력이 작품에 큰 영향을 주는 장르인 만큼 풀어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원작을 읽은 독자들도 만족할 만한 캐스팅을 완성하는 건 더욱더.
그래서였다. 쿠팡플레이를 통해 소설이 영상화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누가 캐스팅됐는지를 가장 먼저 살펴본 건. 이세영과 사카구치 켄타로가 참여한다는 얘길 들었을 때 기대감이 커진 이유도.
하고 싶은 건 많지만 뭘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스물둘의 홍(이세영). 인생의 버퍼링를 겪고 있는 홍은 어릴 적 머문 적이 있는 일본으로 무작정 떠났다가 준고(사카구치 켄타로)를 만난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다고 믿냐"고 묻는 홍에게 준고는 답한다. "어딘가 분명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둘은 사랑에 빠지고 동거에 들어간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준고는 일에 시간을 빼앗기기 일쑤고, 일본에서 기댈 사람은 준고 밖에 없는 홍은 외로움에 지쳐간다. 그렇게 이별이 느닷없이 찾아온다. 그리고 5년 후 한국. 아버지가 운영하는 출판사 팀장이 된 홍 앞에, 소설가로 성공한 준고가 나타난다.
뜨겁게 사랑했던 남녀가 오해로 헤어졌다가 우연히 다시 만나는 이야기. 수많은 멜로드라가 우려먹은 이야기이고, 새로울 게 하나도 없는 상투적인 서사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그러나, 뻔해도 진부하진 않다. 두 작가의 유려한 문자가 철수한 자리를 영상미와 배우들의 연기가 잘 보수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캐릭터 결이 잘 살아있다.
준고는 영원한 사랑을 원하는 여자를 잃은 후 소설 속으로 숨어든 남자다. 홍을 붙잡지 못했다는 후회, 회한, 미련, 틀어진 관계를 다시 복원하고 싶은 간절함. 소설이 자신을 그녀에게 데려다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준고는 홍과 자신의 이야길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아, 시련은 창작의 어머니!) 사카구치 켄타로는 시종 오버하지 않은 적정량의 온도를 유지하며 순애보를 체화한다. 그리고 고요 속에서 열정을 끄집어 낸다. '냉정'하게 돌아서 있는 홍으로 인해 멈춰선 관계를 '열정'으로 다시 가동시키는 건 준고. '고요한 열정'이라는 이 역설이 사카구치 켄타를 통과하며 완성됐다.
반면, 최홍은 준고와 나눈 사랑의 기억을 트렁크에 봉인해 둔 여자다. 준고가 홍을 잊지 않기 위해 홍을 모델로 한 소설을 썼다면, 홍은 준고를 잊기 위해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망각은 마음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실제로 홍은 준고와 공항에서 재회하자마자 얼어 버린다. 그리고, 걸어잠궜던 봉인이 풀리는 소리를 듣는다. 홍은 준고보다 감정의 변화가 조금 더 극적인 인물이다. 감정이 벌어지는 사이 사이를 배우가 잘 설득해내지 않으면 흔들릴 수 있는 캐릭터. 이세영은 그런 캐릭터에 사랑스러움과 성숙함을 무리 없이 이입한다.
6부작이라는 꽤 긴 시간을 확보한 드라마임에도, 감독은 준고와 홍 외의 인물에게는 시간을 크게 허락하지 않는다. 홍과 결혼을 약속한 민준(홍종현)이 준고의 등장으로 느낀 불안이나, 자신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준고를 오랜 시간 마음에 품어 온 칸나(나카무라 안)의 외로움이 상상의 영역으로 상당 부분 생략돼 있다. 그러나 이것이 약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가지를 최대한 쳐내고 홍과 준고에 집중한 까닭에, 주인공들의 감정선이 섬세하게 화면에 담겼다.
여러모로, (영상으로 옮겨진)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은 한국 멜로의 바이블로 남아 있는 명대사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에 대해 관객이 듣고 싶었던 대답을 들려주는 드라마다. 어딘가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 수 있다고. 누군가를 평생 품고 사는 순애보가 아직 존재한다고. 돌고 돌아도 결국 '너'라고. 환승연애와 솔로지옥이 판치는 세상에서 그렇게 사랑을 이야기 한다. 판타지지만, 싫지 않다. 이런, 판타지라면.
(아이즈에 쓴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