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리다 프로젝트>(2018)로 국내에서도 굳건한 팬층을 확보 중인 션 베이커의 작품이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칸 프리미어'도 얻었다. 물론 칸 마크를 보고 겁부터 지레 먹는 관객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부분을 수상한) 봉준호의 <기생충>(2019)이 대중적으로도 관객을 설득했듯, 이 영화도 상당한 재밌를 갖췄다.
뉴욕 브루클린의 클럽에서 스트립 댄서로 일하는 성 노동자 애니/아노라(미키 매디슨). 나름 클럽의 에이스로 불리며 잘 나가지만, 벌이는 녹록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클럽에 온 러시아 갑부 아들 이반(마크 에이델슈테인)으로부터 달콤한 제안을 받는다. '일주일간 나에게만 시간을 써 달라'는. 더 정확히 말하면 섹스 파트너 제안이다. 1만 5000 달러로 거래가 이뤄진다. 술과 섹스, 마약이 뒤섞인 흥 넘치는 일주일이 끝나갈 무렵. 이반의 충동적인 청혼으로 결혼까지 한다. 다이아몬드 4캐럿짜리 결혼반지를 바라보며 애니는 이반이 정말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애니의 인생에 볕이 드는 것인가.
<아노라>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영화는 <귀여운 여인>(1990)이다. 길거리를 전전하던 콜걸이 돈 많은 사업가를 만나 신분 상승을 이룬다는, 리처드 기어-줄리아 로버츠의 신데렐라 스토리 말이다. 그러나 <아노라>는 살랑거리는 멜로 영화가 아니다. <귀여운 여인>의 목적이 판타지였다면, <아노라>의 핵심은 그 판타지를 깨는 데 있다. 왜 그런가.
신데렐라 스토리의 필요충분조건. 백마 탄 왕자다. 그렇다면 이반은 금테를 두르고 애니 앞에 나타난 왕자일까. 안타깝도다, 애니. 이반은 무늬만 왕자다. 실상은 '금쪽이'다. 온갖 폼을 다 잡고 사는 그는 흥청망청의 정도를 초과하는 철부지. 그 와중에, 부모 앞에서는 벌벌 긴다. 자신이 누리는 모든 부가 부모에게서 온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부모가 설계한 미래를 따라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는 그는, 어리다는 핑계로 나름의 귀여운(?) 발버둥도 치는 중이다. 애니와의 충동적인 결혼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아들의 결혼 소식을 접한 이반의 부모는 다급히 3명의 하수인을 급파한다. 이반이 싸 질러 놓은 일을 오랜 시간 뒤처리해 온 이들은 이반과 애니의 결혼을 무효로 만들기 위해 이반의 집을 급습한다. <귀여운 여인>의 길을 가던 영화가 구부러지기 시작하는 건 이때부터다. 우리의 주인공 애니가 위기에 처한 순간, 왕자인 줄 알았던 이반은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기는커녕 '나 살려라' 홀로 365계 줄행랑을 쳐 버린다. 엉거주춤 도망치는 이반을 바라보는 애니의 얼굴 위로 '어처구니없음'과 '이반에게도 사정이 있겠지, 일단 이해해 보자'라는 복잡한 표정이 겹친다.
'신데렐라 스토리'는 대개 주인 잃은 유리 구두가 주인의 품에 안기는 판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아노라>는 반대로 유리 구두의 주인이라 여겼고, 어떻게든 맞지 않은 구두에 발을 욱여넣어 보려 했던 주인공이 버티고 버티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쪽으로 서사가 이행된다. 현실로 떨어지는 이야기지만, 절망적이거나 어둡지는 않다. 험악할 줄 알았던 3명의 하수인이 알고 보니 '허당'이라는 블랙 코미디적 요소 때문이기도 하지만, 냉혹한 현실 속에서 애니가 보여주는 태도 때문이다. '꽃뱀' 취급을 당하는 모멸 속에서도 애니는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어쭙잖은 동정이나 연민 대신, 자존감을 선택한다.
이것은 감독 션 베이커가 약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하다. 포르노 배우와 할머니의 우정을 그린 <스타렛>(2012), 매춘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두 트랜스우먼의 하루를 따라가는 <탠저린>(2015), 성매매한 돈으로 간신히 싸구려 모텔에 기거하는 미혼모와 그녀의 어린 딸을 담은 <플로리다 프로젝트> 등 미디어의 눈이 잘 닿지 않은 주변부를 지속적으로 탐색해 온 션 베이컨은 자신이 선택한 인물들을 존중하는 동시에, 그들을 향한 편견의 필터를 벗겨내는 데 목소리를 내 왔다.
<아노라>에는 그런 션 베이커가 심어둔, 숨구멍과도 같은 존재도 등장한다. 하수인 3인 중 한 명인 이고르(유리 보리소프)다. 아마 <6번 칸>(2023)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2023)를 본 관객이라면, 유리 보리소프가 등장할 때부터 이고르가 단순한 주변인에 머물진 않으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영화계에서 존재감을 키워가고 있는 배우에게 단순한 역할을 맡겼을 리 없을 테니까. 실제로 작은 돌맹이 형태로 <아노라>라는 바다에 던져진 이고르는 서서히 잔물결을 일으키며 애니에게 닿기 시작한다. 유일하게 애니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존재로서.
여기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스포일러 주의). 상대측 피고용인인 이고르를 향해 내내 소리 지르던 애니가, 왜 마지막 순간 이고르의 품에 안겨 눈물 흘렸는지. 조금 더 시간을 앞으로 당겨보자. 지난한 소동(?)이 끝나고, 이고르는 애니를 그녀의 집까지 데려다주는 마지막 임무를 수행한다. 차에서 헤어지는 순간, 애니는 이고르로부터 반지를 하나 받는다. 이반에게 받았던 결혼반지다. 그리고 이반 측에 빼앗겼던 반지다. 그런 반지를 이고르가 몰래 빼돌려, 애니에게 돌려준 것이다.
반지를 받고 머뭇거리던 애니는 운전석에 앉아 있는 이고르 위로 올라타 섹스를 시도한다. 그리고 운다. 반지를 돌려준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아서? 단지 그 이유라면, 눈물까지 흘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럻다면? 돈을 매개하지 않고는 남자와 관계 맺지 않았던 애니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순간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결국 몸밖에 없다는 현실의 벽을 만난 건 아닐까. 이후 애니의 삶이 어떻게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것이 그녀 인생 변화의 시작일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는 낙담의 출발일지. 그러나, 확실한 한 가지. 와이퍼 소리가 울리는 차 안에서 눈물을 쏟는 애니와 그런 애니를 안아 주는 이고르가 전하는 이 묘한 상황이 전하는 위로는 명치끝이 아려 올 정도로 긴 여운을 남긴다.
(*'아이즈'에 쓴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