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살아오면서 엄마를 여성으로 생각한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엄마는 그냥 엄마일 뿐, 언제나 우리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으로만 생각한 듯합니다. 어느 날 문득, 남편을 잃고 어린 자식 둘을 혼자 책임져야 했던 엄마의 나이가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였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엄마가 점점 애틋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도 한때는 나보다 어린 여성이었다는 것, 그것은 이상하리만치 낯설게 다가왔지만 엄마를 이해하는 가장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엄마의 오른손 검지 한마디가 절단되는 사고가 났습니다. 누구나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일들을 겪기도 하지만 그것이 팔순 노모의 일이고 보면 속이 더 타들어가게 마련이지요. 병원에 도착하니 엄마는 벌써 잘린 손가락을 접합하는 수술을 하는 중이었고 놀란 아버지만 수술실 문 앞을 망연자실 지키고 있었습니다. 두세 시간이 지난 후 수술실 문이 열렸고 마취에서 깬 엄마의 첫 마디는 딸 왔느냐는 말이 아니라 작은 손가락을 붙들고 몇 시간씩 고생하게 만든 의사와 간호사 선생님께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이었습니다.
딸 앞에서 아프다거나 사고 당시의 놀란 가슴을 토로할 만한데도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엄마를 어린 시절부터 오래 지켜봤지만 그런 상황에서까지 그런 모습을 보게 되니 참 ‘엄마 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마음을 조금 깊이 있게 헤아리게 된 나는 그런 엄마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나곤 합니다. 엄마는 생선 대가리만 좋아하는 줄 알았던 철없는 아이도 이제는 조금 철이 든 것이겠지요.
접합한 손가락의 예후가 좋지 않아서 다시 절단과 수술을 해야 한다는 소식을 전하는 의사에게 엄마는 여전히 씩씩한 목소리로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그냥 절단하고 쉽게 꿰매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수술에 대해 잘 모르니 의사 선생님이 알맞게 절단하고 덧나지 않게만 잘 꿰매달라고 하십니다. 엄마의 손가락도 수많은 세월의 풍파에 밀려 돌처럼 단단해진 걸까요.
병원 침대에 누운 엄마는 작은 아이 같습니다. 그런 엄마에게도 한때는 나보다 젊은 시절이 있었고, 한때는 사랑하고 사랑받던 이야기가 있었고, 한때는 시련을 견디지 못해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던 때가 있었겠지요. 오늘 아침에는 뜨거운 물수건으로 엄마의 몸을 구석구석 닦아드리니 착한 아이처럼 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연신 시원하다 합니다. 한 손은 붕대를 감고 있어 닦아드리지 못했지만 다른 한 손은 마치 처음 본 손가락처럼 하나하나 정성껏 닦았습니다.
체구가 작은 만큼 손도 작은 엄마, 이 작은 손으로 그 험한 시간들을 헤쳐 나오셨다고 생각하니 그만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주름이 가득한 손, 곳곳에 검버섯이 피어 있는 손,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야위어갈 엄마의 손을 왜 그동안 한 번도 자세히 살펴본 적이 없었을까요.
엄마의 손을 생각하니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납니다. 여름날 저녁 무렵, 동네 아주머니들이 대문 앞 평상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때, 고개를 쳐들고 이야기를 듣다가 졸음이 쏟아지는 눈꺼풀을 애써 치켜뜨던 나를 이끌어 무릎에 누이시고 이마를 쓸어주며 행여 모기에 물릴 새라 손으로 부채질을 해주시던 엄마의 커다란 손 말입니다. 오늘은 아무 말도 필요 없이 그저 엄마라는 이름의 따스한 왕국 안에서 오래 머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두고두고 곱씹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