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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현민 Jan 06. 2023

김은숙이 집필하고 송혜교가 완성한 '더 글로리'

당신은 죽일 만큼 증오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더 글로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보편적인 정서다. 복수를 하는 과정과 심정들은 어느 나라에 있는 사람들이 봐도 강한 메시지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안길호 감독)


복수가 인류의 보편적 소재로 차용될 수 있다는 것에 괜히 씁쓸하다. 더욱이 '학교 폭력'은 성인이 되기 전 많은 것을 배우고 형성할 학창 시절 발생하는 범죄다. 치졸하고 악의적인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방관과 이기심에 휩쓸려 희석되고 처벌조차 미비한 경우가 빈번하다.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는 이런 학교 폭력으로 인생이 처참하게 무너진 한 여자가 온 생을 다해 치밀하게 준비한 처절한 복수를 담아낸다. 김은숙 작가가 집필하고, 송혜교 배우가 이를 연기로서 마침내 완성시켰다.


'더 글로리'가 공개 전부터 화제가 된 이유는, 김은숙 작가의 존재가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김은숙 작가는 앞서 드라마 '파리의 연인'을 비롯해 '시크릿 가든', '상속자들', '태양의 후예', '도깨비', '미스터 선샤인', 그리고 '더 킹: 영원의 군주'까지 소재와 시대는 변해도 언제나 중독성 강한 대사를 앞세운 로맨스에 특화된 작가였기 때문. '더 글로리' 같은 장르물은 완전 처음이다. 그래서일까? '김은숙 작가'라는 이름만 가리면, 집필 작가를 유추하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다. 물론 인물과 인물을 점프하는 특유의 '말맛'은, 장르와 무관하게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기존의 생기발랄한 대사를 대신한 것은, 담담하게 읊조리는 형태의 시적 문어체다.


김은숙 작가는 송혜교 배우와 '태양의 후예'로 한차례 호흡을 맞췄고, 이 작품으로 글로벌 히트를 기록한 바 있다. 두 사람의 재회는 약 6년 만이다. 그때와 각자의 상황도 작품의 결도 전혀 다르지만, 공들여 빚어내는 호흡만큼은 충분히 경이롭다. 동은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로 조각조각 잘게 썰어내 가해자에게 뱉어내는 가시 돋친 대사들은, 시청자에게 짜릿한 쾌감을 안긴다. 자신을 괴롭혔던 연진(임지연)에게 "우리 같이 천천히 말라죽어보자"라고 말하며 "나 지금 되게 신나"라고 건조하게 덧붙이는 장면은 '더 글로리'의 복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인상적인 대목이다. "불쌍하게 연기하지 말자"라는 각오로 캐릭터에 올라탄 송혜교는 동은 특유의 외유내강을 아주 적절하게 표출했다.


<더 글로리> 스틸 ⓒ넷플릭스


가해 주동자 연진은 그런 말에 흉측하게 일그러진 냉소로 화답한다. '예쁜 캐릭터'를 벗고 완벽한 변신을 이뤄낸 송혜교만큼이나 이 작품에서 돋보이는 이를 꼽자면 단연코 임지연 배우다. 데뷔 후 첫 번째 악역, 그것도 메인 빌런으로 나선 임지연은 확실한 시청자 분노 유발 넘버로 맹활약(?) 한다. 천만다행인 것은, 극중 박연진에게 그럴싸한 서사를 부여해 공감 따위를 만드는 행위를 원천 차단한 사실이다. 제작발표회 현장에서 "연진의 악행과 악의에는 그 어떤 이유도, 미화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이 시리즈의 존재 이유"라고 강조했던 김은숙 작가의 의지가 고스란히 반영된 셈이다. 끔찍한 연쇄 살인마에게도 피치 못할 사정을 만들어 억지스럽게 공감과 동정심을 유발하게 이끄는 여타 작가들이 보고 새겼으면 한다.


문동은의 복수는 촘촘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허술해 보이는 구석이 존재한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중년 여성 강현남(염혜란), 아버지의 죽음으로 끔찍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의사 이도현(주여정) 등 한 팀을 이루는 이들이 복수에 최적화된 팀은 아닌 탓이다. 하지만 이는 '피해자들의 연대와 가해자들의 연대는 어느 쪽이 더 견고할까'라는 동은의 내레이션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고 해소된다.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상처를 통해, 상대의 아픔도 온전히 지지하고 연대하는 강력한 힘이 있다.


학교 폭력은 연예계에서도 항상 뜨거운 화두다. 한참 잘 나가는 배우, 아이돌, 셀럽이 '학폭 폭로'로 인해 고꾸라지고 좌초되는 모습을 종종 목도한다. 적당히 '철없던 시절의 실수'로 매듭짓고 조심히 활동을 이어가거나,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안 난다'라고 잡아떼거나, 폭로 당사자를 만나 어떻게든 봉합하고 '해프닝'으로 마무리 짓는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자연스레 피해자를 말과 시선으로 날카롭게 겨누고 재차 상처 주는 일이 아주 빈번하다. 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고 깜깜한 극야(極夜) 한가운데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는 피해자들이 용기 내는 것이 더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학폭 피해자들이 가장 큰 상처를 받는 말은 "그래서 너는 아무 잘못이 없어?"라는 말이라고 한다. 김은숙 작가가 탄생시킨 '더 글로리'가 작가 본인의 바람대로 "그렇다. 아무런 잘못이 없다"라는 피해자의 항변을 대신하는 작품으로 거듭날 수 있으면 한다. 그리고 어딘가에 숨어 여전히 잘 먹고 잘 살고 있을 가해자들이, 죄책감과 불안감으로 좀 더 고통받길 바란다. 나아가 이러한 작품과 일련의 과정이 공포와 두려움의 씨앗이 되어, 앞으로 더 이상 그 어떠한 형태의 폭력도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2023년 1월 4일자 국방일보 21면에 게재된 [박현민의 연구소] 연재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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