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말씀을 잘 들어야지 착한 사람이지.
나는 어릴 때부터 그 말에 의해 가스 라이팅 당해왔다.
아주 오랫동안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
덕분에 착한 사람 코스프레 증후군을 앓았다.
결혼을 했다.
혈연의 감옥을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시집이라는 감옥에 갇혔다.
나의 일상은 새벽 4시, '불편한 소리들' 과 함께 시작됐다.
거실과 주방 바닥을 바지런히 오가는 시어머니의 발소리
접시 쌓는 소리, 냄비 뚜껑 여닫는 소리, 수돗물 흐르는 소리.
움직일 때마다 며느리 들으란 듯 시어머니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아이고' 소리.
'싫다'는 감정이 차곡차곡 쌓여 나를 짓눌렀다.
싫다는 감정에 사로잡혀 미칠것만 같았지만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몰랐다.
뭔가에 사로잡히면 무수한 많은 길들이 보이지 않는다.
시어머니와 나는 하루 종일 한 공간에 같이 있었다.
시어머니는 나를 길들이기 위해 혹은 가르쳐야 한다는 명목으로 끊임없이 집안일을 내놨다.
아침마다 친정이 마련해온 예단품들을 꺼내놓고 친정의 안목을 비웃었다.
같은 여자이면서 친정 부모를 비웃는 말들이 며느리에게 어떤 상처를 줄지 생각하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나를 싫어했던 이유는 그녀의 성에 차지 않는 "혼수"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는데 왜 혼수가 필요하지?
실반지 하나면 충분하지 않은가. 출발점에서 뭘 그렇게 많이 가지고 시작하려는 것인가.
두 사람이 일해서 차곡차곡 만들어가면 될 것을.
예식장, 드레스, 혼수품, 결혼식 부조는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악습이다.
실반지 하나가 아닌, 더 많은 것을 요구할 땐 그 결혼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내 부모님은 혼수를 마련하기 위해, 결혼식장을 빌리기 위해 빚을 냈다.
나는 그 빚에 책임감을 느꼈다.
책을 들고 앉을 여유도 일기 하나 쓸 나만의 공간과 시간이 없었다.
외출도 허락을 받아야 했다.
외출 시 의복도 격식에 맞아야 했다. 반바지를 입고 나가려다 쫓겨날 뻔했다. 나는 다 포기했다.
흙을 만지고 싶었고 그림이 그리고 싶었다. 글도 쓰고 싶었다.
성공해서 전시를 하거나 자신만의 공간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방송이나 잡지에서 볼 때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무력감을 느껴야 했다. 그 무력감은 나를 갉아먹었다.
시어머니는 자신의 말에 복종하지 않으면 쓰러져 눕는 것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시키려 했다.
나만의 공간과 나만의 시간이 없는 24시간 365일은 날 미치게 했다.
나는 착한 며느리, 착한 아내가 되려 애썼다.
왜 그래야 하는지
왜 누군지도 모를 착한 며느리가 되려했는지
그 행동지침이 가스라이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란 사실은 알지 못했다.
가스라이팅은 당신을 당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 만든다.
'착한 사람이 되지 않겠어!'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한숨 쉬는 버릇이 더해갔다. 나는 한 숨을 숨쉬듯 토했다.
싫다는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시도했다.
자살을 시도하려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그가 눈을 뜰 때까지 이길 말고도 다른 길이 있음을 상기시켜줘야 한다.
내가 이혼한다고 했을 경우 일어날 일들을 상상했다.
그 상상은 대부분 비극으로 끝났다.
다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자살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에이가 간헐적으로 생각났지만 에이의 연락처를 알 수 없었다.
에이는 결혼했을까.
에이가 결혼했다면 나처럼 살진 않겠지.
에이는 반항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남편에게 분가해서 살 수 없다면 작은 방을 얻어 달라고 했다.
남편이 일하는 동안 그곳에 있다가 퇴근해 돌아올 시간쯤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했다.
잠시라도 시어머니가 뿜어내는 감시의 눈초리로부터 벗어나 숨을 쉬고 싶었다.
내 몰골을 보고 남편은 집 가까운 곳에 방을 하나 얻어줬다.
주인집 부부와 같은 공간에 방만 하나세 놓는 곳이었다.
나는 그 방에서 잠까지 자고 싶었지만 그 주인집 아저씨의 눈빛이 본능적으로 무서웠다.
내가 손에 넣은 짧은 시간은 오롯이 맘 편한 시간은 아니었다.
12시면 돌아가야 하는 신데렐라처럼 시집으로 돌아가야 할 그 시간을 생각하면
어렵게 얻은 그 시간을 오롯이 사용하지도 못했다.
가시방석 위의 자유랄까.
나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다.
소설이라는 것을 써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셋방도 겨우 한 달 살고 나왔다.
그래도 시어머니로부터 잠시나마 떨어져 있을 수 있었던 그 한 달간의 작은 방에서 느꼈던 자유와 두려움.
몇 퍼 센터의 작은 자유의 맛은 나에게 다음 스텝을 내딛을 수 있게 했다.
시집으로 다시 돌아온 후 나는 외출을 하겠다고 말했다.
못마땅한 시선이 나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를 훑었다.
그 시선에 주저앉게 될까봐 나는 허락도 떨어지기 전에 현관을 내려서서 신발을 신고 있었다.
담배를 피우던 에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담배와 라이터를 샀다.
카페 화장실에 숨어 처음으로 담배를 피웠다.
몸으로 들어온 담배연기는 내 감정을 가라앉혔다.
구토와 현기증이 생겼다.
가라앉을 수록 내 자신과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나는 이토록 매시매초 내 자신과 하나가 되길 바라면서도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두고 미친 듯이 자판을 두드렸다.
작법을 배워 본 적 없는 내가 소설을 쓰고 있었다.
소설에 로그인 하면 현실에서 로그아웃 할 수 있었다.
현실로부터 멀리 도망쳤다가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 되면 가까스로 털고 일어났다.
현실로 돌아오기 싫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몇 달 만에 어줍잖은 장편 소설 하나를 완성했다.
하지만 보여줄 곳이 없었다.
신춘문예에 투고했다.
이것이 어떤 탈출구를 열어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결과는 낙선이었다.
앞으로 나아갔던 시간은 뒷걸음쳤다.
전진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는 한 발도 앞으로 내딛지 못했다.
신춘문예에 떨어진 나는 외출할 명목을 대지 못했고 다시 바늘구멍 하나 들어갈 수 없는 시어머니의 고집과 퉁명스러움 아래 닦고 쓸고 치우는 일들을 시작했다.
어제 닦은 선반을 오늘 또 닦아야 하고, 어제 닦은 마루도 또 닦아야 했다.
제기를 비롯 창고에 넣어둔 그릇과 물건들까지 모조리 꺼내 광이 나도록 닦으라 했다.
남편의 속옷과 양말 그리고 손수건, 겉옷들을 다림질해야 했고
남편의 속옷은 반드시 따로 삶아 손빨래를 해야 했다.
시어머니는 친구들을 초대했고 내게 친구들의 신발을 닦으라 했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지만 시어머니는 그렇게 하기를 강요했다.
나는 24시간을 집안일을 하는 데 사용하는 삶을 이해할 수 없었다.
쓸고 닦고 치우고
쓸고 닦고 치우고
삶이 오로지 그것뿐인가.
어째서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하지만 내겐 시어머니가 요구하는 집안일을 거부할 논리도 용기도 빈약했다.
나는 시름시름 앓았고 급기야 정신줄을 놓기 시작했다.
커피에 설탕 대신 소금을 탔고 시어머니가 집안일하라고 불러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11시가 다 되어가던 시각, 쓰레기를 버리려고 나갔던 나는 정말 너무도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만화방으로 도망쳤다.
만화방에 들어가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움츠려 있던 어깨가 스르르 펴졌다.
남편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나를 살린 것은 미국행이었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에이를 떠올렸다.
에이는 반항하는 사람이었다.
반항하는 사람은 가스 라이팅을 당하지 않는다.
가스 라이팅을 당한 것은 내가 나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안다고 해서 쉽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직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는 상태였다.
남편은 타인을 속박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나는 자유를 만끽했다.
집안일은 내킬 때만 했다. 대부분의 시간은 빈둥거렸다. 두 다리 뻗고 앉아 드라마를 보고 스케치를 하고 한국에서 가지고 온 책을 읽고 강요가 아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러자 한숨 쉬던 버릇이 없어졌다.
내 목에 걸렸던 무수한 올가미와, 수족을 감았던 족쇄와
내 외피에 다닥다닥 붙은 비늘을 매일 하나씩 벗겨냈다.
진정한 자유란 그런 것이다.
알맹이를 보게 해준다.
하지만 그 자유는 오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