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찬 - 재생력
황인찬 시인 / 창비 - 사랑을 위한 되풀이 수록
다 함께 모여서 방학숙제를 했지
무슨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그것은 여름 내내 여러 마음이 엇갈리고, 지구의 위기까진 아니어도 마을의 위기쯤은 되는 사건을 해결한 뒤의 일
아이들은 하나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이 장면은
불안하고 섬세한 영혼의 아이들이 모험을 마치고 일상을 회복하였으며, 앞으로도 크고 작은 모험을 통해 작은 성장을 거듭해나갈 것임을 암시하는
그런 여름의 대단원이다
물론 중간에 다투기 시작한 아이들 탓에 결국 숙제는 끝내지 못할 테지만
뭐 어때, 숙제는 언제나 남아 있는 거잖아 (웃음)
사건 이후에도 삶은 이어지고
마을은 돌아가고
아이들은 어른이 되는 거야
여름 내내 모험에 도움을 주었던,
온갖 사물에 깃든 신령들에게 마음속으로 안녕을 고했지
지금의 일상을 소중히 하자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결국 애들은 싸우기 시작하고,
한참을 씩씩대며 서로를 바라보다
다 함께 웃는 것으로
이 장면은 끝난다
그리고 기나긴 스태프롤
검은 화면을 지나면
다시 첫 장면이다
앞으로 벌어질 마음 아플 일들을
알지 못하는 방학 직전 어느날의 교실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야
여름을 통과하는 동안 우리는 또 어떤 성장을 할까,
그것을 궁금해하며
카메라는 천천히
여름의 푸른 하늘을 향해 움직인다
좋아하는 시다.
송승언과 마찬가지로 상상의 끝을 갔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느낌의 시다.
시의 제목이 너무 좋다
재생력.
이 시를 읽을 때 마다 새 살이 돋아나는 기분이다.
나의 어릴 적과 나의 현재와 지금의 불안을 잠재워주는 여름의 푸른 하늘
시를 하나 더 보여주고 싶다.
현대문학상 수상시집에 수록된 황인찬 시인의 '백 살이 되면' 이라는 시다
백 살이 되면 좋겠다
아침에 눈을 뜨지 않아도 된다면
좋겠다
엄마가 불러도
깨지 않고
아빠가 흔들어도 깨지 않고
모두 그렇게 떠나고 나면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면 좋겠다
물방울이 풀잎에 구르는 소리
젖은 참새가 몸을 터는 소리
이불 속에서 듣다가
나무가 된다면 좋겠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 나무 밑에서 조용히 쉬고 계시면 좋겠다
빛을 받고
뿌리를 뻗으며
오래 평화롭게 잠들 수 있다면 좋겠다
그 잠에서 깨어나면
여전히 한낮이었으면 좋겠다
온 가족이 모여 내 침대를 둘러싸고 있으면 좋겠다
부드러운 오후의 빛 속에서
잘 쉬었어?
오늘 기분이 어때?
내게 물어보면 좋겠다
그럼 나는 웃으면서
백 년 동안 쉬어서 아주 기분이 좋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다
정말 좋겠다
황인찬의 시는 재생의 초월이 있는 것 같다.
읽고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숲의 향기가 나는 것만 같다.
그의 시에서는 유난히 시의 시간성이 많이 느껴지는데
이부분이 좋다.
비단 황인찬 시의 매력이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시 속 시간의 흐름에 따라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변한 게 없어보이지만 일련의 사건 속에서 무언가 변하였고
더욱 단단하게 재생되었다는 느낌이 좋다.
기도를 드리고 난 이후의 축복이 나와 함께한다는 믿음
영적인 성장
송승언의 시는 보존의 축조의 매력이 있다.
송승언의 시에도 시간성이 존재하지만
송승언의 시에서의 시간은 재생되거나 상황이 나아지거나 하지 않는다.
시간에 따라 공간의 형태가 변화하지만 결국 공간은 보존된다.
송승언은 하나의 공간을 여러 형태로 변화시키면서 공간의 재 축조한다.
그 과정에서 폐허의 느낌이 나기도하지만 아무것도 없어 평화로운 공터의 느낌도 준다
공간에서 엄청난 일들과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공간에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평화가 느껴진다.
이 두가지의 미묘한 평화 혹은 안정감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