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자의 일기쓰기 16
내가 많이 좋아한다는 걸 몰랐으면 좋겠다. 계속 풋풋하고 싶다.
나는 술을 못한다. 선천적으로 맞지 않는다. 몇 도의 술이건 소량의 알코올이 들어가 있으면 토한다. 다른 사람들의 목을 적셔주는 술은 너무나도 맛있어 보였다. 그러나 나의 목을 넘어가는 술은 너무 맛이 없었다. 소주는 물론이고 맥주, 와인, 막걸리 전부. 특히 소주와 막걸리는 정말 내 취향이 아니었다. 칵테일과 데킬라는 조금 맛있었다. (세부에서 워크숍 때 마셔본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지만 마셔본 술 중에 가장 맛있었다.) 30대가 넘어가니 탄산으로는 묵은 체증이 해소되지 않는 날이 많아진다. 술을 마시고 싶다. 그러나 나는 술을 마시지 못한다. 그래서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친구가 없는 편이지만 얼마 없는 친구들에게는 늘 당부한다. 내 생일선물은 차와 시집, 연필을 사달라고. 나에게 줄 시집과 차를 사면서 너도 한번 해보라고. 참 좋다고.
첫 차는 작두콩 차였던 거 같다. 그냥 있길래 마셨다. 그 이후에는 히비스커스, 루이보스, 캐모마일, 페퍼민트, 펜넬, 레몬밤, 라벤더, 새싹보리, 마테, 얼그레이, 잉글리쉬 블랙퍼스트, 레몬그라스, 유자 등 다양하게 즐겼다. 차의 효능은 느끼지 못했다. 히비스커스를 먹는다고 피부가 좋아지거나 라벤더를 먹으니 잠을 잘 잤다거나 루이보스를 먹었더니 소화가 잘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매일 새로운 걸 마시니 기분이 좋았다. 어느 날에는 집에 가서 차를 마실 생각으로 하루를 버틴 적도 있었다. 작년 3월에는 센스 있는 친구에게 오설록 티백 선물 세트를 받았었는데, 너무 맛있었다. 녹차는 찐 녹차고 꿀배와 유자, 영귤 다 맛있었다. '오설록'과 함께 추천하는 차 브랜드는 '다비앙'이다. 차 종류도 많고 샘플러로 여러 종류의 차를 먹으며 마음에 드는 차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차 브랜드와 종류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아보지 않았다. 그냥 차면 됐다. 성분이고 제조사고 어디에서 만들었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차를 마실 때 집중하는 미각과 시간이 중요했다. 차를 즐기면서 여러 나라와 원두를 사용한 커피도 마셔봤는데, 마찬가지다. 인도/베트남이 조금 더 고소하고, 에티오피아/케냐 쪽이 산미가 세고, 수프리모/예멘 쪽이 묵직한 느낌이다. 애주가가 주종을 고르지 않듯 어느 차/커피 건 상관없다. 나는 차와 커피를 마시고 싶을 뿐이다.
너무 깊게 알고 싶지는 않다. 그냥 즐기고 싶다. 사랑하지 않고 좋아하고 싶다.
내가 많이 좋아한다는 걸 몰랐으면 좋겠다.
계속 풋풋하고 싶다.
물을 부으면 은은하게 퍼지는 꽃내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