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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ads Aug 24. 2023

죽음이 인간의 기본 고민

정찬, <유랑자> 감상 


<유랑자>, 책이 낯설지 않다. 읽었었나?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전혀 없다. 블로그를 보니 내가 2018년에 읽었었다. 책 속 포스트잇을 붙여놓은 문장을 적어놓으며, 그에 대한 짧은 감상도 적혀있다. "소설 유랑자의 메시지를 현실이란 구체적 시공간에서 어떻게 물화할지 막막하다. 전생과 연관된 내 업보를 씻는 행위를 씻김굿처럼 해야 하는 것인지. 붓다가 말한 대로 앎의 첫 단계 내 전생을 기억하기 위해 수행을 해야 할 것인지."


이브라힘의 전생 기억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현재적 행위, 실천으로서 어떤 상징을 나타내는지 아직도 모호하다.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의 질문은 죽음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죽음에 대해서 질문을 품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나는 죽음이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해본적이 있는가? 그것은 나에게 그저 피하고 싶은 화두여서 질문을 해본적이 없는 듯하다. 죽음을 환생,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로서 생각은 차치하고.


나는 기도하고 있다. "현재의 내 육체와 정신에 평안을 주셔서, 당신에게 갈 때까지 평안하게 살다가 가도록 해주십시요." 결국 내 기도는 현생에 대한 기도이다. 내 현재의 가장 큰 고민을 중심으로 한 기도이다. 내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유일신, 그리고 천당, 지옥으로 연결되는 죽음이라는 믿음이 강고한가 ? 내 기도 내용은 그렇다. 그러나 그 기도는 현재에 대한 내 두려움의 발로일 것이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보통의 나이든 사람들과 같이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현생의 고통이다. 죽음보다 실제로 날 두렵게 하는 것은 병든 몸이다. 건강한 몸을 원하는 것은 현생의 미련이라기보다 실제적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렇다면 고통을 끝낼 수 있는 죽음을 원하는가. 그도 아니다. 그러니 현생에 대한 미련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말대로라면, 인간이라면 죽음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생로병사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은 인간임을 포기하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난 현생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만 있을 뿐이다. 죽음에 대한 고민이 없다 그저 두려움으로 그에 대한 생각을 유예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물론자? 그도 아니다. 허약한 유물론자, 허약한 기독교인일 뿐이다. 현재의 고민에 그저 침몰되어 삶의 원초적 고민도 않는 나약한 인간임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난 환생을 원하는가. 무엇이 아쉬워서 환생을 하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내 의지, 바람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질서라면 어떡해야 하나. 환생, 죽음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유랑자 책을 덮으면서 진정으로 내가 천착한 것은 작가 정찬의 능력이다. 철학적 명제를 이렇게 이야기로 풀 수있는 작가의 능력이 탐날 뿐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책을 언제 읽은 적 있지 않나하는 가물가물한 기억력이 조금은 두렵다. 유랑자가 뭐였지하고 안개 낀 기억회로를 갖지 않기를. 제발 나의 감상이 기억되길 바란다. 결국 내 감상은 철학적 명제와는 아주 먼 현실적인 것으르 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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