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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ads Aug 24. 2023

<오토라는 남자>와 나

넷플릭스에서 톰 행크스 주연의 <오토라는 남자>를 어제 봤다. 영화 제목을 보고 어디서 본 듯했다. <오베라는 남자>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두편의 영화는 북유럽 작가의 책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나는 그 작가를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작가와 동일한 작가라 생각했었다. 그리고 창문 넘어 영화의 주연과  오베라는 남자와 <오베라는 남자>의 주인공 배우도 동일인이라 착각했었다. 


아마도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북유럽 작가인데다, 주요 캐릭터가 남성 노인이라는 점이 혼동을 만든 것 같다. 한국에서 대중적 배우가 아니니, 백발의 인상으로만 동일인이라 착각했던 것 같다. 백인 남성, 노인 남성이라는 전형적 이미지를 내가 갖고 있었나보다.  


<오베라는 남자>는 재미있게 감상했던 기억이 어렴픗이 난다. 오베의 비극적 상황보다는 그의 독특한 성격이 눈에 들어왔었다. 그런데 톰 행크스의 <오토라는 남자>를 감상할 때는 달랐다. 그가 느끼는 인생의 허무감 , 자살 욕구 때문에 몇번 눈물을 흘렸다. 그래도 가장 많이 가슴을 찡하게 한 것은 그가 삶에 대해서 긍정적 태도를 가지게 되는 장면과 그가 (다행히도?)자연사한 장면이었다. 


오토는 자신의 부인이 더이상 곁에 있지 않다는 점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는다. 그리고 그것은 자살 생각으로 연결된다. 오토와는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어도, 그 원인이 무엇이든, 늙음 그 자체가 종종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늙음, 특히 자기 일을 잃은 노인은 우울증을 갖게 된다. 오토는 부인의 죽음과 함께 직장에서 퇴직하게 된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쓰레기 처리 등 주변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런 행동이 까탈스러운 성격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할 수 있는 사회적 성격의 일이었다.  그는 사교적이지는 않은 보수적 사회성을 갖고 있는 인물이다. 


이와 비슷한 성격으로 영국드라마의 <애프터라이프 앵그리맨>이 있다. 이 주인공도 부인을 잃은 남자이다. 이 사람도 매일 부인의 묘에 가서 이야기를 나눈다. 이 사람은 그나마 자기 일이 있다. 인물의 성격이 비슷하나 지역신문 기자라는 속성상 주위 사람들과 만날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하면 오토는 자신의 직장에서 퇴직하였다. 그에게는 사회적 관계의 상실이며, 자신이 자부심을 갖고 있던 엔지니어로서 자기 역할의 상실이 가져온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싶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나. 이렇게 중요한 것을 상실했을 때 급격히 우울해지고,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와 드라마는 그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음을 알려준다. 그들을 아직도 세상이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오토에게는 새로 이사온 이웃, 마리솔의 가족이 있다. 


내가 오베라는 남자보다 오토라는 남자에게 감정이입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두 영화의 시간차가 만든 것이다. 몇년 전보다 현재 내 상황이 더 우울함을 인정안 할 수 없다. 오토처처럼 내 삶의 의미를 난 찾을 수 없다. 내게는 책임져야 할 가족, 존재의 이유라 할 수 있는 사랑도 없다. 그렇다면  내 고립을 막아줄  사람들과 부딪히는 일이 있는가? 사회에 내밀 명함도, 이렇다할 일이 없다. 날 필요로 하는 일,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일을 찾자면 없는 것은 아니다. 성당의 봉사일이 있지만 나와 아직도 거리가 있다. 난 아직도 내가 예전에 했던 일의 연장선 상에서 봉사일도 하고 싶다. 그러고보니 오토랑 똑같다. 내 과거의 일과 관계를 중심으로 내 현재의 의미를 찾고 있으니말이다. 내 현재에 만족해야한다고 주문하지만 쉽지 않네. 내가 매일매일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고, 그저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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