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읽는 지식재산 5편
1890년 7월 아무도 없는 오베르(Ouvers)의 한 들판에서 한 젊은 화가가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한다. 그의 이름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그의 나이 37살때였다. 목격자는 아무도 없었고, 자살시도 후 30시간만에 그는 숨을 거둔다. 그를 치료했었던 가셰 박사도, 그를 후원하고 지지했던 동생 테오도 고흐의 임종을 지켜 보았다. 총알은 갈비뼈를 비껴나가 그의 가슴을 관통하여 척추 부근에 박혔다. 이 상태로 그는 자신이 머물던 라부(Ravoux)여관으로 비틀비틀 걸어 왔고, 그 곳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그의 죽음 얼마 후인 8월에 벨기에의 주간 신문인 L'echo Pontoisien에도 고흐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실린다.
고흐의 죽음 이후 동생 테오도 매독에 의해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6개월만에 위트레흐트에서 생을 마감한다. 두 형제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묘지에 나란히 묻히게 되고, 이에 더하여 막내 여동생인 빌레미나 반 고흐(Willwmina Jacoba van Gogh)도 정신병으로 생을 마감하였고, 막내 남동생인 코르넬리우스 반 고흐(Cornelius van Gogh)는 자살했다고 하니, 집안의 내력이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빈센트 반 고흐는 네덜란드의 후기인상주의 화가이고 생전에 900여 점 이상의 유화 작품을 그렸으나 팔린 작품은 단 한 점일만큼 살아서는 인정받지 못 한 비운의 화가였다. 지금의 고흐의 인기를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지만. 그러나 그가 죽은 후 고흐는 미술 역사상 최고의 화가 중 하나라는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정도로 인정을 받게 된다. 고흐의 작품 중 고흐가 죽은 해인 1890년 그린 <가셰 박사의 초상(Portret van Dr. Gachet)>의 첫 번째 버전(이 그림은 두 가지 버전이 있다)은 1990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일본의 제지회사 다이쇼와제지의 회장인 사이토 료헤이에게 8,250만 달러(약 900억원)에 판매되어 그 당시 미술품 경매가의 최고 기록을 세운 바 있으며(이전 고흐 그림의 최고가는 <아이리스(Iris)>가 1987년 기록한 5,890만 달러였다), 그 이후에도 1889년 고흐가 프랑스 남부의 생폴 드 모솔 수도원에서 요양 당시에 그린 그림인 <들판의 농부(Laboureur dans un champ)>가 2017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8,130만 달러에 경매되는 등, 인정받는 초고가의 그림의 주인공이자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화가가 된다.
한편 <가셰박사의 초상>을 사들인 사이토 료헤이는 1996년 사망하게 되는데, 이전에 1991년에는 "고흐와 르누아르의 두 그림을 자기가 죽으면 관에 같이 넣어 화장하고 싶다"는 유언을 한 사실이 알려져 세계적인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그의 유언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이러한 유언을 철회하는 발표를 하긴 했지만, 비뚤어진 미술품에 대한 소유욕이 아닐 수 없다.
그럼 다시 처음의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이 그림은 고흐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알려져 있는, <까마귀가 있는 밀밭(Wheatfield with Crows)>이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라고도 변역하는데, 뭐 어째든 까마귀가 날건, 있건 그건 번역자의 취향이겠다. 이 그림은 고흐가 1890년 5월 생 레미(Saint Remy)의 요양원을 떠나 파리 근처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에 가서 약 3개월 정도를 머물게 되는데, 그 시기의 그림이다. 이 그림은 가로로 긴 캔버스를 이용해 빠른 붓질로 거칠게 밀밭을 그리고, 어둡고 낮은 하늘에 여러 마리의 까마귀를 그려 넣었을 뿐 아니라, 밀밭 사이에 갈라진 길을 그려 넣어 자살 직전 고흐의 방황과 절망감 등을 잘 표현한 것이라고 평가된다. 이 그림과 관련하여 동생인 테오에게도 "성난 하늘 아래의 거대한 밀밭은 묘사한 것이고, 나는 그 안에 있는 슬픔과 극도의 외로움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편지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고흐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고 타살이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자살을 위한 권총이 발견되지 않았고, 자살의 원인이 분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그 당시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그 어느 때보다고 정신이 맑고 정상적이라고 자신을 표현하기도 했다), 고흐의 몸에 박힌 탄환의 방향을 분석해 보면 그 방향이 가까운 거리에서 다른 사람의 총에 의한 것으로 분석된다는 등의 의문점 때문이다. 이러한 의문을 다룬 영화가 2017년 개봉된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라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세계 최초로 유화로 만든 애니메이션이며, 무려 100명의 화가가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흐의 그림들 중 내가 처음 그림을 실제로 본 것은 미국 뉴욕에 있는 현대미술관(MoMA, Museum of Modern Art)에서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을 본 순간이었다. 2001년경 뉴욕이 일이 있어서 잠깐 머무는 동안 미술관을 찾았고, 그곳에서 이 작품을 보았다. 보는 순간 머리가 멍해지고, 아무 생각이 안 나면서 그림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10여 분이 훌쩍 넘어간 후였다. 1817년 이탈리아 피렌체를 방문한 사실주의 문학의 시조라 불리는 <적과 흑(Le Rouge at le Noir)>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Stendhal)이 귀도 레니(Guido Reni)의 그림 <베아트리체 첸치>로부터 느꼈다는 "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을 느낀 것이다. 스탕달 신드롬은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부터 몸의 힘이 빠지고, 심장이 빨리 뛰거나, 의식의 혼란 내지 어지러움증 등을 느끼는 현상을 의미하며, 스탕달이 자신의 경험을 묘사한 책 <나폴리와 피렌체: 밀라노에서 레기오까지의 여행>에서 처음 밝힌 후 이 용어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스탕달이 신드롬을 느낀 그림은 <베아트리체 첸치>가 아니고 14세기 화가 조토가 그린 산타크로체 교회의 프레스코화라는 것이 밝혀졌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다.
스탕달 신드롬을 넘어서 위대한 작품을 보면 이를 파괴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는데, 이러한 현상을 "다비드 증후근(David Syndrome)"이라 한다. 이는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이자 미술사 연구가인 그라지엘라 마게리니(Graziella Magherini) 박사 팀이 연구한 결과로, 플로렌스의 아카데미아 갤러리에 전시된 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다비드(David)>상(미켈란젤로는 다른 조각가가 만들다 중지한 거대한 대리석을 이용해 다비드상을 제작했다)을 보러 온 관람객 중 약 20%가 파괴 충동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이 조각상을 본 관람객 중 일부는 황홀감, 초조함 등을 느끼다가 공격성을 띄게 되었고, 실제로 1991년에는 어느 한 관람객이 망치로 다비드상의 발을 내려쳐 손상을 입힌 적이 있다고 한다. 한편, "루벤스 신드롬(Rubens Syndrome)"이란 용어도 있는데, 이는 로마 심리학 연구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루벤스와 같이 풍만한 여성들이 관능적으로 그려진 그림이나 근육질의 남성들과 함께 그려진 그림들을 보면 성적인 의미의 행동을 하게 되는 심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여간 위대한 작품들은 심리적으로 감상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다시 고흐의 그림으로 돌아오면, 고흐는 여러 선배 화가들의 그림을 모사하거나 새롭게 그리기도 했는데, 그가 가장 사랑한 화가는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cois Millet)라고 한다. 이는 고흐의 그림 중 상당수가 밀레의 그림을 모사한 것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밀레는 우리가 <이삭줍기(The Gleaners)>나 <만종(The Angelus)>이라는 유명한 그림을 그린 화가라고 알고 있다. 그는 프랑스의 바르비종파(Barbizon School)의 창립자 중 하나로, 사실주의(Realism) 또는 자연주의(Naturalism) 화가로 알려져 있다. 바르비종파란, 19세기 초 중반 프랑스 교외의 작은 도시인 바르비종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화가들의 집단을 일컫는 말로, 밀레를 비롯한 카미유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 찰스 프랑수아 도비니(Charles-Francois Daubigny), 테오도르 루소(Theodore Rousseau) 등이 대표적인 화가이다. 앞선 글에서 들라크루아 등으로 대표되는 낭만주의가 장 자크 루이 다비드(Jean Jacques Louis David) 등의 신고전주의(Neo Classicisme)를 누르고 미술계의 주류로 올라섰음은 이야기 한 바 있다. 이러한 낭만주의의 미술경향은 바르비종파에 의해 자연 속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골의 풍경과 일상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앞서 본 모네(Claud Monet)의 이야기에서 본 것과 같은 인상주의가 나오게 된 배경이 된다. 즉, 밀레의 자연주의를 표방한 바르비종파는 인상주의의 모태가 된 것이다.
한편 밀레의 <만종>은 저녁 만(晩)자와 쇠북 종(鐘)자를 쓰며, '저녁 종'의 의미인데, 원제목인 'Angelus'는 카톨릭에서 하루 3번 일과를 멈추고 하는 기도(삼종기도)를 의미한다. 이 그림은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전통적인 고전주의적 규범을 잘 버무려 고전주의와 사실주의의 화해를 이룬 작품이라고도 평해진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그림 속의 농부 부부 발 밑에 있는 바구니에는 감자가 들어 있는데, 원래 밀레가 처음 그린 것은 감자가 아니라 그들의 아기 시체였다는 것이다. 부부의 기도는 일상적인 기도가 아니라 굶어 죽은 자신들의 아기를 위한 것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이후 초현실주의 작가인 살바도르 달리는 <만종>이나 <건축적인 달리의 만종> 등 여러 번에 걸쳐 밀레의 이 그림을 오마주(Hommage)하기도 한다. 이러한 논란은 루브르 박물관이 X 레이 조사를 통해 <만종>의 초벌그림에서는 실제로 아기의 관을 스케치한 것이었다는 입증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스케치는 대략적인 스케치의 특성상 바구니인지 관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다. 그것이 관이든 아니든 당시 농민들의 피폐한 삶을 생각하는 밀레의 마음을 반영한 논란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래의 사진은 살바도르 달리의 <만종(The Angelus)>이다.
다시 고흐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고흐는 낭만주의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로부터 일본의 우키요에(우키요에는 일본의 17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에도 시대에 정립된 풍속화를 말하며, 가쓰시카 호쿠사이, 게이사이 에이젠, 우카가와 히로시게 등의 작가가 유명하다)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한다. 당시 인상파 화가들에게 우키요에는 일본풍이라는 의미의 자포니즘(Japonism)이라고 불리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래의 그림을 보면, 고흐에게도 미친 자포니즘의 영향을 알 수 있다.
고흐는 특히 밀레의 그림을 많이 모사하는데, 그 숫자는 밝혀진 것만 21점에 이른다. 그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첫 걸음(First Step)>, <밤(Night)>, <낮잠(La Siesta)>, <씨 뿌리는 사람(The Sower)> 등이 대표적이다. 그 중 <씨 뿌리는 사람>은 고흐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즈음부터 여러번에 걸쳐 모사를 하는데, 고흐 그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아래의 그림에서 밀레와 고흐의 그림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과 맨 앞에 언급한 고흐의 마지막 작품 <까마귀가 있는 밀밭> 등은 밀레의 영향이 고흐에게 얼마나 컸었는지를 보여 준다. 이렇게 밀레에게 영향을 받은 고흐도 밀레와 마찬가지로 역시 농민들과 자연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씨 뿌리는 사람>이 뿌리는 씨앗이 어떤 씨앗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밀밭에 대한 고흐의 그림이 많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보나 밀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밀의 자급률은 얼마나 될까?
지난 2015년 기준 한국에서 밀의 자급률은 1.2%에 그친다. 거의 우리나라에서 나는 밀은 없다고 보면 된다는 의미이다. 식량의 자급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는데, 전체 식량의 자급률도 겨우 10.6% 밖에 안 되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향후 식량은 국제적인 무기로서의 역할도 증대될 예정이며, 외국에 대한 식량의 의존율이 지나치게 높다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다. 게다가 식량은 국민의 건강을 좌우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또한 우리 국민의 건강한 먹거리를 위해서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라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밀 뿐 아니라 콩이나 쌀까지 식량의 종자를 우리는 외국의 기업에게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21세기는 종자전쟁의 시대라고도 한다. 그만큼 종자의 문제는 중요하다. 예를 들어 지난 2010년 아이티 지진으로 수많은 인명 및 물적 피해가 있었던 것을 기억해 보자. 이때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 몬산토(Monsanto)는 굶주리고 있는 아이티 농가에 470만톤의 유전자조작(GMO) 종자와 비료를 구호품으로 무상 제공한다. 여기까지 보면 인도적인 행위하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구호물자는 기존의 농업을 황폐화하고, 생물 다양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재배되는 식량에 대한 안전성이 입증되지도 않았으며, 더욱이 재배 2년차부터는 몬산토에 로열티(royalty)를 내야만 했다. 즉, 몬산토는 처음에는 무상으로 주고, 나중에는 아이티의 농업을 지배하는 한편, 로열티까지 챙기겠다는 얄팍한 상술을 부린 것이다. 몬산토와 같은 기업이 수익을 얻는 방식은 자신의 종자를 심게 되면, 거기에 맞는 제초제를 사용하여야만 하고, 이 제초제를 사용하게 되면 다시 이에 내성을 갖는 종자를 심을 수 밖에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몬산토의 종자를 심고, 거기서 재배된 종자를 다시 심으면 새롭게 종자를 몬산토로부터 사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닐까?
물론 그럴 수 있다. 여기에서 몬산토가 취하고 있는 전략이 바로 지식재산권이다. 식물의 종자에 대해서도 식물특허(plant patent)를 취득할 수 있다. 그런데 몬산토는 전 세계 유전자 변형 식물(GMO) 종자 특허의 90%를 가지고 있다. 이를 활용하여 몬산토는 이미 수백 명의 농부들을 상대로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참고로 몬산토는 베트남 전쟁에서 고엽제로 수 많은 피해를 입힌 에이전트 오렌지(Agent Orange)라는 제초제를 팔던 기업이기도 하며, 지난 수십 년간 세계에서 제일 많이 팔리는 제초제는 몬산토가 생산하는 라운드 업(Round-Up)이라는 제품이다. 이 라운드 업은 인체에 암을 발생시키는 발암물질로 국제보건기구(WHO)의 국제암연구소에서도 인정한 바 있어, 전 세계의 환경운동가들에게는 악마같은 존재로 여겨질 정도이다.
그러면, 이제 특허제도와 몬산토 특허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특허제도는 한 마디로 말하면, 산업발전 및 인류에게 유용한 발명을 한 자에게는 일정한 보호를 해 주고, 대신 그 발명을 전체 산업의 발전을 위해 공개하라는 취지의 제도이다. 즉, 특허권자가 누리는 혜택은 공개를 대가로 일정 기간(출원일로부터 20년) 동안 남이 같은 발명을 실시할 수 없도록 하는 배타적인 권리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특허권자가 자기가 만든 제품을 시장에서 판매를 했다고 치자. 그리고 이 제품을 산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에게 판매를 한다. 우리가 흔히 보는 상업적 거래의 형태이다. 특허권자가 공장을 돌려 물건을 생산하면, 이것을 도매상이 구입하고, 다시 소매상이 도매상으로부터 구입을 한다. 이 소매상들이 소비자인 고객에게 해당 제품을 판매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특허권을 침해하는 행위에는 특허발명이 적용된 제품을 "생산"하는 행위뿐 아니라, "사용, 양도, 대여" 등의 행위도 침해행위가 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나는 특허가 있는지 모르고 그냥 침해품을 사서 사용만 하고 있어"라거나, 특허침해가 되는 제품을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사람이 "이건 내가 만든 것이 아니야"라고 해도 정당한 특허권자를 보호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특허권의 행사가 문제가 될 수 있다. 특허권자가 자신의 제품을 도매상에게 판매한 다음, 이를 도매상이 소매상에게 판매할 때 해당 도매상에게 "야! 그것은 내 특허권을 침해하는 거야"라고 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러면 정상적인 상거래는 이루어 질 수 없고, 특허권자는 이미 자기 제품을 시장에서 정당하게 판매한 다음에도 그 제품이 도매상으로부터 소매상으로 넘어가면 그 도매상이 특허제품을 판매한 것이므로, 그에게 특허침해를 주장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시 소매상으로부터 소비자로 넘어가면 또다시 소매상에게 특허침해를 주장할 수 있게 된다. 그 다음에 소비자가 그 제품을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이러한 거래나 사용이 여러 번 반복될수록 특허권자는 계속해서 로열티를 받을 수 있게 되고, 거래단계가 많을수록 그 로열티의 총량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이건 불합리하지 않은가?
그래서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 '권리의 소진(right exhaustion)'이다. 특허권자가 특허가 구현된 제품을 정당하게 시장에서 판매를 하면, 그 제품에 대해서는 다시 자신의 특허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법리이다. 즉, 특허권자의 정당한 제품의 판매가 이루어지면, 그 때 특허권자의 권리는 소진되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저작권에 적용되면 최초판매의 원칙(First Sale Doctrine)이라 하고, 특허권에 적용되면 특허소진의 원칙(Patent Exhaustion Doctrine)이라고 한다. 이것이 적용되어야 원활한 상거래가 이루어질 수 있고, 특허권자에게 부당하게 과도한 이익을 주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특허와 마찬가지로 지식재산권의 일종인 저작권의 예를 들면, 미국에서 어느 저작물이 출판되어 책으로 나와 판매가 될 때 그 책이 미국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판매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각 국가의 실정에 따라, 예를 들면 태국에서는 보통 책 가격이 미국에 비해 훨씬 싸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이 책을 미국의 가격보다는 훨씬 싸게 파는 경우가 있다. 만일 미국의 책 가격이 10만원이었는데, 같은 책이라도 태국에서는 5만원에 판매가 된다면, 어떤 사람이 태국에서 책을 5만원에 사서 미국에서 8만원에 팔면 미국의 저작권자는 이 사람에게 자신의 저작권을 침해하였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가 문제된다. 이같은 분쟁이 미국에서 있었고, 수팝 커트생(Supap Kirtsaeng)이라는 태국계 미국유학생이 출판사 존 와일리 앤 선즈(John Wiley & Sons)와 소송을 한 것이었다. 소송은 대법원까지 가서 대법원은 2013년 저작권의 침해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 이유는 위에서 본 저작권법상의 '최초판매의 원칙'에 의해 이미 태국이라 할지라도 시장에서 정당하게 판매가 되면 그 책에 대한 저작자의 권리는 판매되는 당시에 소멸되어 다시 이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정당하게 팔린 그 책에 대해서 적용되는 원칙이다.
이제 고흐와 밀레가 그린 <씨뿌리는 사람>이 뿌리고 있는 종자(씨)로 돌아가 보자. 몬산토 같은 회사가 종자를 판매한다. 농부는 그 종자를 심어서 다시 수확을 얻는다. 수확을 한 다음 대부분은 시장에서 판매를 할 것이고, 일부는 남겨서 그 다음 농사에 심게 된다. 그러면 매년 종자를 사지 않아도 된다. 이제 몬산토의 입장에서 보면, 종자는 한번 팔면 다시는 특허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수익이 늘어날 여지가 없고, 지속적인 사업을 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따라서 몬산토는 농부가 심어서 수확한 것을 다시 심으면 특허를 침해한 것이니 상응하는 로열티를 내라고 하게 된다. 이러한 소송이 미국에서 많이 발생하였고, 그 중 하나가 미국 대법원까지 올라가 지난 2013년 판결이 내려진 보우만 대 몬산토(Bowman v. Monsanto) 판결이다.
이 소송의 피고인 버논 휴 보우만(Vernon Hugh Bowman)은 인디애나주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였다. 그는 몬산토의 유전자 변형 콩인 라운드업 레디(Roundup Ready) 콩 종자를 매년 사서 심어왔다. 그러다 보니, 매년 새로운 종자를 사기 보다는 수확한 콩을 다시 심으면 반복해서 콩 종자를 사지 않아도 되니까 자신이 수확한 콩을 다시 심어 농사를 짓게 된다. 이를 발견한 몬산토가 자신의 특허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게 된다.
보우만은 예상대로 "특허소진"을 주장한다. 즉, 몬산토가 콩 종자를 시장에서 팔았으니 그 시점에서 해당 콩 종자에 대한 몬산토의 특허권은 소진되어 그 콩을 정당하게 구입한 사람이 그걸 가지고 밥을 해 먹든 두부를 만들어 먹든, 다시 그걸 팔든, 아니면 그 콩을 심든, 이 모든 행위에는 몬산토의 특허권이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방법원은 몬산토의 손을 들어 주었고, 항소심에서도 다시 보우만은 졌다. 이 판결에 승복하지 않고 보우만은 대법원에 상고까지 하게 된다.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특허권이 소진되는 것은 몬산토가 판 바로 그 콩 종자에만 해당되고, 그로부터 다시 복제(그 콩을 심어 수확한 자손이 되는 콩)에는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고 판결한다. 즉 콩을 심어서 다시 종자를 재생산하는 행위에는 원래 종자의 특허권이 미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몬산토의 종자를 심는 농부들은 다시 수확된 자손인 종자를 심을 때에는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여야 한다는 결론이 난 것이다. 따라서 특허 제품이 정당하게 시장에서 판매가 되면 바로 그 제품에 대해서는 구매자가 이를 팔든, 사용하든, 무엇을 하든 구매자의 마음대로 해도 된다. 제품을 판매한 그 시점으로부터 그 제품에 대해서는 특허권자의 권리는 소진되어 더 이상 특허권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자의 경우를 보면, 시장에서 판매된 바로 그 종자에만 특허권이 소진되는 것이지, 이로부터 재생산된 자손이 되는 종자에까지 특허권이 소진되는 것은 아니므로, 이에 대해서는 특허권자의 권리가 미친다는 것이다.
결국 몬산토는 농부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종자에 대해서도 자신의 특허권에 근거하여 로열티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따라서 막대한 수익을 보장받게 된다. 게다가 이러한 부담은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유전자 변형식품(GMO)의 문제 외에도 과연 이러한 정책이나 제도, 법원의 태도가 바람직한지는 의문이 있다. 법적인 논리에서는 타당할 수 있으나,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일이 아닌가. 과연 초국적 기업에게 우리의 생명이 달린 먹거리를 독점시키는 것, 그리고 이를 특허제도 만으로 규제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먹거리에 대해서는 새로운 규제나 제한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입법이나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