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랜만에 개발자의 해우소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미리 선정해 둔 주제들 중 어떤 것을 다뤄볼까 고민하다가 '매너리즘'이 눈에 띄었습니다.
저도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했었는데요. 어떻게 극복했는지 공유해보기 위해 이 글을 쓰게 되었어요.
매너리즘의 정확한 뜻을 찾아보니 아래와 같네요.
늘 같은 수법(手法)을 되풀이하여 신선미(新鮮味)나 독창성을 잃는 일. 순화어는 `타성'.
늘 같은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 문제의 원인인 것 같아요.
회사에 소속되어 일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같거나 비슷한 일들을 되풀이하는데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서 ‘나 매너리즘에 빠졌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나 봅니다.
왜 그럴까요?
자연스러운 현상일까요? 어떻게든 견디고 넘어가야 할 상황일까요?
자리를 박차고 상황을 개선해야 할까요? 퇴사나 이직을 해야 할까요?
많은 생각들이 들 텐데요.
우리 곁을 맴도는 '매너리즘'을 같이 이야기해보기 위해, 네 명의 다양한 연차와 경험으로 구성된 판교 개발자들이 모였습니다.
A: K사에서 근무, 경력은 약 4년
J: K사에서 근무, 경력은 약 7년
W: N사에서 근무, 경력은 약 3년
H: N사에서 근무, 경력은 약 5년
매너리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떻게 극복해볼 수 있을지 각자의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며 매너리즘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매너리즘을 느낀 적이 있으신가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H: 그럼요. 최근 느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한 매너리즘이 왔었어요. 개발하는 것을 좋아해서 개발자가 되었지만, 비슷한 일을 반복하면서 고인물처럼 행동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일로서 하다 보니 마감일자를 지키기 위해 더 나은 방법이 생각나도 적용할 수가 없는 상황도 있고요.
J: 저는 개발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이 없는 것이 너무 아쉬워요.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남이 짜뒀던 코드를 유지 보수하거나 이슈 대응하고 로그 보고, 회의록 적는 게 게 하루 일과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해요. 개발자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힘들었어요.
W: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다 보면 '기존 시스템에 적용하면 좋을 것'들이 생각나는데, 다른 짜친(?) 일을 하느라 못할 때가 많이 아쉽죠. 고칠 수 있는 여력을 만들 수가 없이 계속 /* TODO */ 만 늘어나는 걸 깨달았을 때, 무력감에 빠지더라고요.
J: 제가 하고 싶은 것들과 회사에서 요구하는 일의 우선순위가 다르기 때문에 계속 부채가 쌓이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리팩터링도 마찬가지죠. 리팩터링을 해야 한다고 하면, 회사에서는 '지금 잘 돌아가는데? 왜 해?'라는 반응을 지속적으로 들으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는 것 같아요. 레거시를 찍어내는 기계인가 라는 생각이 들죠.
W: 맞아요. 그런 것들이 쌓여서 레거시가 되고 좋지 않은 구조의 API나 로직을 서비스해야 한다는 게 답답하네요. 개선은 할 수 없는데 서비스해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반복되다 보면 짜증이 날 때가 있어요.
A: 공감해요.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거대한 시스템에 사용하는 언어 버전을 업그레이드하지 못할 때가 있었는데, 낮은 테스트 코드 커버리지, 쌓여있는 다른 일들, 부족한 시간이 그 이유였죠. 하고 싶은 게 있는데 다른 이유들 때문에 못하고 비슷한 업무만 반복적으로 하다 보니 무력감에 빠지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혼자서 하고 싶다고 해서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더라고요. 나만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같이 일 할 팀원들의 공감과 우리 조직과 협업하고 있는 다른 조직의 이해도 필요한 상황이었던 거죠.
H: 이제는 더 이상 단순히 신기술을 재밌어하는 레벨이 아니게 됐어요. 즐거움을 느끼는 여러 단계가 있죠. '와 이번에 node.js가 업그레이드되었대! 적용해보자!'라며 재미를 느낄 수도 있지만, 주니어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터득하고 아키텍처 같은 큰 그림을 생각하고 더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런 것에 대한 것은 책에 나와있지 않아요.
A: 책에 나와있지 않다는 말은.. 주변에 적절한 멘토가 없어서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하는 거네요?
H: 맞아요. 제게 기술적으로 영감을 주고 조언해주던 멘토님이 은퇴를 하셨을 때, 저는 무력감에 빠졌었어요. 나는 리더도 아니고 기술적으로 뛰어난 상태도 아닌데 어떡하지?라는 생각도 있었고요.
J: 저는 어느덧 7년 차가 되었는데요. H님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헤어샾에 갔는데, 원장님이 7년 차 헤어 디자이너셨어요. 저랑 같은 연차인데 본인의 브랜드도 있고 완성된 프로덕트도 있죠. 미용사는 하나의 프로덕을 만드는데 몇 시간이 걸려요. 피드백을 받고 더 개선하고 나아가는데, 저는 개발하려면 짧게는 몇 주, 몇 달 혹은 1년 이상이 걸리기도 하죠. 그 미용사분을 보며 내가 더 많이 만들어봐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회사에서 개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회사가 나의 매너리즘을 다 해소해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필요한 부분은 개인이 밖에서 더 노력해서 해소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H: 맞아요. 제가 지난주에 느꼈던 건데, 저희가 하는 알고리즘 스터디도 저에게는 매너리즘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어요. 알고리즘 문제들을 풀면서 많이 해소가 되었어요. 제가 처음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재미를 느꼈던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리게 해 주더라고요.
A: 맞아요.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해소하면 될 텐데요.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회사에서는 어떠세요? 개인적인 욕구가 해소가 되면 회사에서는 괜찮으신가요?
H: 회사의 일에서는 어느 정도 매너리즘이 남아 있겠죠. 하지만 요즘 제가 신나게 되면서 느낀건 제가 근래 개발에 대한 흥미 자체가 다운되어 있었더라고요. 나 자신이 발전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했었던 거였어요. 리더를 통해서 뭘 해야 할지는 명확하게 알고 있었지만 원동력이 없어졌기도 했고요. 완전히 매너리즘을 극복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막 극복하기 시작했어요. '코딩은 내가 즐기는 것이었지!'를 느끼며 기초부터 다시 쌓아가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지난주에 회사에서 코딩하는데 즐겁더라고요.
J: 저는 그 고민을 비슷하게 하다가 다른 길로 빠진 적이 있어요. 내가 개발자를 업으로 하는 게 맞나? 내가 코딩할 때 정말 즐겁나? 글을 쓰는 게 낫나? 아닌데 나는 글 쓰는 거 안 좋아하는데;; 내가 뭘 재밌게 하는지 헷갈리기 시작했어요. 무슨 상태일까..
A: 저도 J와 정말 똑같은 생각을 했었어요. 저도 개발자를 때려치우고 옛적 나의 꿈인 요리사를 다시 도전해볼까 하며 요리학원 브로셔를 찾아보기도 했었어요. 업종을 바꿔 재취직을 하는 것도 생각해봤는데.. 가성비를 생각해봤을 때 개발자만큼 가성비 좋은 것이 없더라고요(ㅎㅎ).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가성비 좋은 것을 더 선호하는 성향이라서요. 이렇게 생각을 계속하다 보니 자연스레 개발자로 다시 귀화했고, 무기력함이 어느 정도 해소되더라고요. 개발이 정말 저랑 안 맞았으면 가성비고 뭐고 관뒀을 텐데, 그런 건 아니었나 봐요. 저에게 있어 개발은 적당하게 재밌고, 남들에 비해 엄청 잘하는 것 같지는 않은 그런 것인데요. '개발보다 더 재밌고 더 뚜렷하게 잘할 만한 게 뭐가 있지?'라고 생각해보니 또 개발만 한 게 없더라고요. 그러면서 마음이 자연스레 잡혔어요!
J: 맞아요. 개발을 좋아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지요.
W: 저는 개발이 천성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른 것을 생각해보진 않았어요. 집중력도 개발할 때만 높은데요.. 제가 매너리즘에 빠졌을 때에는 연차는 쌓여가는데 '내가 개발자로서의 역량이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안 설 때였어요.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내가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없을 때
매너리즘에 많이 빠지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J: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 이야기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떼쓰는 것은 아닐지 라는 생각도 드네요.
A: 어떤 일이냐에 따라 다를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기술 부채를 해소하자고 계속 이야기하는 것을 떼쓰는 것이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구조개선이나 리팩터링을 하지 않고 오래된 기술을 계속 사용한 채로 신규 서비스만 개발한다면요? 레거시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러한 이유로 사고가 발생했을 때는요? 오히려 엔지니어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술 부채처럼 계속 이야기해서 꼭 해야 할 일들도 있는데, 이런 것들이 절대 용인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저의 환경(조직)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K: 저도 첫 회사에서 위와 같은 상황들을 종종 느꼈어요. 그래서 회사와 나를 분리하는 것이 맞는 건가 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회사에서는 저의 시간을 돈을 주고 산 것이니 내가 원하는 것은 넣어두고 회사에서 원하는 일을 해야 하는 건가 보다. 하지만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더라고요.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의 시간을 회사에서 보내고 있는데, 개인적인 성취감이나 만족감이 부족하다면 결국 주저앉게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W: 회사와 내가 분리되면 오히려 사기가 떨어지죠. 일을 대할 때의 태도가 '나의 일이라기 보단 어떤 일'이 되는 것이니깐요. 결과물의 품질이 떨어지게 될 텐데 오히려 회사에서 이런 것들을 고려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당하게 이야기합시다.
H: ‘나’스럽게 극복하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문제가 뭔지 파악하는 게 우선이겠죠. 입사를 한 순간부터 나의 한 일들이나 감정 같은 것들을 되돌아보고 적어나가다 보면 어디서 좌절하게 되었는지 알게 되더라고요. 저는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하지 못해서 생기는 무기력함이었어요. 그래서 나의 영향력을 먼저 만들어두려고 했어요. ‘구조 개선을 이런 방식으로 하고 싶은데, 1달만 주세요.’와 같은 적극적인 모습으로요.
A: 맞아요. 나의 영향력을 만들어 둬야 한다는 것에 깊이 공감합니다. 조직장도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조직원에게 공평하게 관심을 쏟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나의 성향과 뜻을 알아주길 바라기보다는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어필해야 하죠. 그런 것들이 self promotion을 잘하게 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요. 저는 십몇 년 차의 동료들과 일을 하고 있지만 하고 싶은 일이나 말이 생길 경우 눈치 보지 않고 합니다. 조직장에게도 저의 성향을 드러내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사실 저를 드러내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는데, 계속 연습을 하다 보니 되더라고요. 조직장이나 동료가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것만으로도 저는 매너리즘이 많이 극복되었습니다. 또 다른 일을 시작할 원동력이 되기도 했고요.
혼자서 극복할 방법을 그래도 모르겠다면 주변 비슷한 상황의 친구들에게 나의 상황을 공유해보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말을 하면서 생각이 정리되거나 문제 상황이 명료해질 때가 많아요. 주변에서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답은 본인이 찾아야 하는 것 같아요.
J: 맞아요. 이때 주의할 점은 개발자가 아닌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면 부연설명이 더 길어질 수도 있어요.ㅋㅋ개발자 친구에게 하는 걸 추천합니다.
H: 세상에 두 가지 일이 있는데 운으로 되는 일, 노력이 필요한 일이 있대요. 대부분은 노력으로 인해 우리가 원하는 일들이 일어나는데, 우리가 단기간에 목표로 하는 레벨이 너무 높은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을 때, 무기력함이 오는 것은 아닐까요?
J: 맞아요. 반드시 크게 성공해야 할 필요는 없죠.
H: 모든 개발자들이 계속 발전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어요. 남들은 이런 기술 저런 기술 써보고 이야기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은 최악의 상황이고 피하고 싶어 하죠. 그런데 이런 거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나의 꿈은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 꿈에 다가가기 위한 스텝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당장의 일들에 크게 연연해지지 않는 것 같아요. 저는 CEO가 되고 싶고 지금 하는 일들은 그것이 되기 위한 과정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어요. 당장의 핫 트렌드를 전부 알지 못해도 제 꿈은 흔들림이 없죠.
A: 맞아요. 매너리즘에 빠졌다면 나의 꿈이 뭐였는지 생각해보고 다시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는 것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꿈’이 뭘까요? 사장님, 다둥이 아빠, 엄마, 국회의원, 연봉 1억 개발자 같은 타이틀 만이 꿈일까요? 저의 꿈은 '나중에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에요. ‘에게 이게 꿈이야?’ 남들이 흔히 말하는 '꿈'과는 조금 거리가 있을 수 있어요. ‘저는 CEO가 될래요 CTO가 될래요.’가 아니잖아요.ㅎㅎ 그런 기준에서 본다면 제 꿈은 불명확하고 두리뭉실하죠. 하지만, 꿈이 반드시 직책이거나, 직급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원하는 것이 꿈이고 CEO나 CTO는 내가 원하는 것을 실현시킬 어떤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다 보면, 그게 한 분야를 깊게 파는 것이든, 여러 분야를 얕게 경험하는 것이든 결국 '나스러운' 스타일이 생기지 않을까요? 마음은 편해요.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들이 쌓이다 보면, 매너리즘이 와도 금방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저는 실제로 그렇거든요.
H: 맞아요. 공감해요.
A: 욕심이 끝이 없는 것 같아요. 계속 더 재미난 것을 하고 싶어요. 성공에는 끝이 있을까? 상대적인 거라.. 새로운 일을 하면 매너리즘은 다시는 오지 않을까? 아니요. 옮겨도 결국 거기에 적응되면 다시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매너리즘에 빠졌다 해서 너무 오래 붙잡고 고민하지 않았으면 해요. 물러 갔다가 또 찾아올 테니깐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보면 어떨까 싶어요. 나 스스로 만족하고 매너리즘을 잘 극복할 나만의 방법을 찾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나를 모르는데 매너리즘에 빠졌다면, 나를 알아가는 게 먼저 순서인 것 같아요.
저희가 생각한 매너리즘을 탈출하기 위한 로직은 아래와 같아요.
1. 나의 문제 상황을 찾고, 문제를 정의하자.
2.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먼저 알자.
3.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고민하되, 나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고민하자.
4. 혼자 해결이 어렵다면 문제를 공유하자. 나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5. 나의 꿈을 복기하고 다시 달려보자!
매너리즘은 더 좋은 환경과 상황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몸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고 생각해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친구라고 생각하고, 매너리즘에 빠졌다 해서 좌절하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