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eemeetskun Mar 12. 2021

보편적 학습 설계, 직접 경험 중

누군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대부분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봄학기가 시작된지도 어느새 두 달째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하버드 교육대학원의 보편적 학습 설계 (Universal Desigh for Learning, 이하 UDL) 수업이 진행되는 방식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려고 한다. UDL 수업은 매번 몇 가지 이유로 나를 놀라게 한다. 첫 번째 이유는 이렇게나 당연하고 반드시 필요한 교육적 접근 방식을 여태껏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새삼스런 충격.  두 번째 이유는 내가 정규 교육을 받았던 시기의 교육 시스템은 아무리 기억을 헤집어 보아도 너무나 보편적이지 못했다는 사실. 세 번째 이유는 학습 장애가 없는 나 역시도 UDL 기반의 학습 설계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 이유와 두 번째 이유는 어찌 보면 그 맥락을 같이 한다. 학생 때를 돌아보면 매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과목별로 교과서를 배부받았고, 수업시간에는 선생님이 칠판에 쓰신 필기를 내 노트에 베껴 쓰기 바빴으며, 숙제 역시 교과서를 읽고 나의 생각을 서술하거나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릴 적부터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했던 나에게 학교 수업은 다루는 내용만 다를 뿐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내가 이해한 내용을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서는 별 차이가 없었다. 다시 말해 나는 우연히 정규 교육 방식의 틀 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성향과 취향을 타고났기에 큰 어려움 없이 그 시기를 지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땐 정말 몰랐다. 나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방식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큰 장애물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학교 수업시간에 집중을 못하거나, 수업 내용을 따라가는 것을 버거워하거나, 숙제를 제대로 해오지 못하는 친구들은 그저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쉽게 치부해버렸다. '왜'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하게 구는지, '왜' 수업 내용을 못 따라가는지, '왜' 남들은 하기 싫어도 해오는 숙제를 기어코 완성하지 못했는지를 헤아리기에 나는 너무 어렸고 무지했다. 보편적 학습 설계 수업 수강신청을 하기에 앞서 '내가 겪지 않은 어려움에 대해서 굳이 내가 나서서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과연 내가 실제로 경험해보지 않은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결론적으로 한 번 해보지 뭐! 하는 심정으로 수강신청을 했다. 


UDL 수업은 그 운영에 있어서도 UDL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따른다. 다시 말해 수업 진행부터 과제까지 UDL의 세 가지 주요 원칙 (1) 다양한 방식의 학습 참여 (engagement) 기회를 제공한다, 2) 다양한 방식의 표상 (representation)을 제공한다, 그리고 3) 다양한 방식의 행동과 표현 수단 (action and expression)을 제공한다)을 기반으로 한다. 예를 들어보겠다. 


[수업 과제]

다음 수업을 위해 미리 학습하고 이해해가야 하는 논문이나 책의 경우, 텍스트 파일 제공을 기본으로 하되 교수나 조교들이 직접 녹음한 파일을 제공한다. 활자를 읽고, 그때그때 필요한 메모를 하는 것을 선호하는 학생들은 텍스트 파일을 읽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눈 대신 귀를 여는 것을 선호하는 학생들은 녹음 파일을 고른다. 녹음 파일은 어색한 로봇이 아닌 실제 사람의 목소리라 내용을 듣고 이해하기에도 거슬리는 것이 없다. 그리고 녹음 파일에는 총 소요 시간이 표시되어 있어 내가 수업 준비를 하는 데에 얼마만큼의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지 예측할 수 있어 편리하다. 나는 오랜 시간 주로 눈으로 읽고, 글로 쓰거나 말로 발표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지라 학기초에는 텍스트 파일 위주로 읽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다섯 시간 연속으로 줌 미팅을 한 뒤, 눈도 머리도 너무나 피로해져 더 이상은 컴퓨터를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수업 전에 읽어가야 하는 논문들이 있었고, 반신반의하며 음원파일을 클릭하고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는데 웬걸, 신세계를 만난 것이다! 조교가 또박또박 읽어주는 논문 내용을 눈을 감고 듣고 있다가, 중요한 내용이나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내용은 여러 번 재생을 할 수 있어 편했다. 이 좋은 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그때부터 이 수업의 예습은 눈 대신 귀가 수고해주고 있다. 난독증이나 ADHD가 있거나, 시력이 좋지 않은 학생들에게 음원 파일은 꼭 필요한 도구일 것이다. 놀랍게도 학습 장애가 없는 나에게도 유용하다. 

매 수업 전에 예습한 내용, 예습하면서 생긴 질문이나 의견 등을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PPT 슬라이드에 정리해두면 12시간 내에 teaching team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는 말 그대로 자유형식이다. 글로 쓰고 싶다면 한 페이지 이내로 쓸 것, 이라는 권고사항만 있을 뿐이다. 내가 배우고 생각한  내용을 그림이나 도표, 만화로 표현해도 좋고, 재잘재잘 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녹음한 파일을 업로드해도 좋다. 중요한 건 어떤 형식을 따랐느냐가 아니라, 습득한 지식을 내 것으로 소화해서 풀어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업 진행]

수업은 5분간의 명상으로 시작된다. 학생마다 수업 전에 소화한 일정, 개인적인 일들, 그날의 컨디션이 제각각일 것이기에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함'을 인지하고, 수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나의 몸과 정신을 준비시키는 시간이다. 명상 방법은 간단하다. Teaching team이 명상에 도움이 될만한 글귀를 읽어주거나 음악을 틀어주면 각자 편안한 자세로 5분간 숨 고르기를 하면 된다. 수업을 위한 마음의 준비는 학생들이 알아서 해야지 뭘 그런 것 까지 학교에서 신경 쓰나 여길 수도 있겠지만 나의 경우 이 명상시간이 정말 소중하다. UDL수업이 있는 날은 오전 8시부터 수업 시작시간인 10시까지 1분도 쉬는 시간 없이 세 개의 미팅 릴레이가 있기 때문이다. 허덕거리며 수업에 입장하는 순간은 제정신이 아닐 때가 많다. 수업 직전까지 열띤 토론을 벌이는 터라 머릿속은 수업에 임할 준비를 미처 못한 상태인 경우다. 그런 나에게 5분간의 명상은 그날 처음으로 숨을 돌리는 시간이다. 이전의 일들은 잠시 접어두고 지금 이 순간 이 수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준다. 너무 고마운 나머지 조교를 붙잡고 고맙다고 말했다... 덕분에 살 것 같다고 ㅋㅋㅋ

수업은 전체 토론과 소규모 토론을 번갈아가며 한다. 학생들이 수업 전에 PPT에 올려둔 내용 중 특별히 신선한 내용이나 표현방식이 있다면 수업시간에 공유하고, 그날의 주제에 대해서 다 같이 이야기를 나눈다. 수업 자료를 학습하는 과정에서 미처 해결하지 못한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수업 중반으로 접어들면 teaching team이 준비해둔 과제/미션을 랜덤 하게 배정된 소규모 그룹끼리 수행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입이 떨어지지 않는 학생들도 소규모 토론시간에는 재잘재잘하게 된다. 서로의 말에 귀 기울여줄 것, 부정적인 코멘트보다는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고받을 것, 모든 사람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으며 나는 늘 틀릴 수 있음에 대해서는 학기 초부터 내내 강조된다. 나로부터 가는 말이 고울 테니, 오는 말도 고울 거라는 근거 있는 믿음이 생기고 나면 토론 분위기는 한결 화기애애해진다. 

[프로젝트]

수업 자료와 과제, 토론시간을 통해 배운 것을 바탕으로 그룹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UDL 기반의 교육 상품을 기획하는 프로젝트인데, 어떤 상품을 기획할 것인지, 주요 학습 대상자는 누구인지, 어떤 기술을 사용할 것인지는 모두 학생들에게 달려있다. 이런 그룹 프로젝트를 몇 개 돌려보면서 깨달은 사실은, '더 많이 고민한 사람이 운전석에 앉는다'는 사실이다.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내고 싶은 것이 분명한 사람일수록 초반에 설득력을 갖기 쉽고, 이러나저러나 좋은 사람들은 원하는 것이 확실한 사람의 바람을 이뤄줘도 잃을 것이 없으니 함께 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해 우수한 과제를 제출한 학생들의 사례를 공유해주기도 하는데, 보아하니 박물관 도슨트 시스템 개선 방안부터 고등학생 일정관리 도우미 앱까지 다양하다. 우리 팀은 난독증이나 ADHD를 가진 학생들이 텍스트 기반의 수업자료로 점철된 전통적 교육 시스템에 매몰되지 않고, STEM 과목들을 보다 흥미롭고 효과적으로 학습할 수 있도록 돕는 디지털 게임을 디자인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학습 장애가 없는 학생들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젝트 팀원들과는 일주일에 두어 번씩 만나서 프로젝트 진행상황을 체크하고, teaching team과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나 프로젝트 관리 스킬을 배운다. 과제는 체계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을 정도의 scaffolding 역할을 톡톡히 해주며, 교수님은 약속하신 시간까지 깨알같이 자세한 피드백을 주신다. 어느 정도로 깨알 같냐면 '아, 너무 자세히 읽으신 나머지 우리가 쓴 단어 하나하나를 분석하신 것 같아... 무서워...' 물론 교수님의 피드백에 묻어나는 어투는 토론시간과 마찬가지로 곱디곱되 날카롭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가질 수 있는 거였나. 

프로젝트 그룹원들과는 오늘 아침에도 한 시간 정도 미팅을 했다. 어색하던 두 달 전과는 달리 이제는 하하호호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공유한다. 성적에 연연하는 것은 의미 없다. 어차피 졸업하고 나면 기억도 안 날 성적 따위 신경끄자라기 보다는, 놀랍게도 이곳의 수업들은 즐기면 즐길수록 성적이 잘 나온다. 프로젝트 팀원들과 사이좋게, 재미있게, 남들보다 잘하기보다는 남들과는 다르게 해 보는 것에 의의를 두고 남은 학기 파이팅해보려고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