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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솔 Mar 04. 2022

‘우리’라는 말은 정말 개개인을 포함할까요?

“평범한 게 좋다면 그건 당신 취향이 아니에요. '우리' 취향이죠.”


‘평범한 게 좋다면 그게 당신 취향이에요.’라는 광고 카피를 본 적이 있다. 평범이 취향이 될 수 있다니 참신한 카피라 생각했다. 하지만 평범한 게 좋다면, 그건 거짓일 수도 있다. 살아오며 알게 모르게 강요받은 그런 거짓. (물론 진짜 좋은 걸 수도 있지만.)


전교생이 지나는 복도 게시판에 그림이 걸리는 건 꿈만 같은 일이었다.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처럼 ‘게시판에 그림이 걸렸으면 정말 좋겠네~’하며 혼자 노랠 부르다가 어느 날 예상하지도 못한 그림이 걸렸던 기억이 난다.


당시 그림 대회의 조건은 ‘단색 물감으로 그라데이션 하늘을 만들고, 그 위에 검은색 종이를 오려 집을 붙이기.’


벽에 걸리고 싶어서 무조건 눈에 띄고 참신하게 하려고 계속 생각을 떼굴떼굴 굴렸다. 결국 하늘에는 보통 쓰이지 않는 노란 물감으로 배경을 칠했고 과일 모양으로 집을 만들었다. 그것 말곤 더 생각할 수가 없었지만 학교에 전시되게엔 턱 없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별로 참신하지 않았으니까. 어떤 애니메이션이나 동화에 충분히 나올법한 집이었다.


대충 이런 느낌이었는데 그때 더 잘 그린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당선됐다. 이유를 알 수 없어 아이들이 돌려받는 그림으로 다가가 살펴봤다. 다들 한국에서 찾기도 힘든 세모 모양 지붕의 집이나 자기가 사는 네모난 건물들을 잔뜩 붙여놨다. 하늘은 해질 때의 붉은색 아니면 파란색이 대부분이었다. 집의 형식은 분명 자유였다. 하늘도 어떤 색으로 칠해도 상관없었다. 왜 애들은 그렇게 했을까. 그날따라 하굣길에 자세히 보이는 것들이 이상했다.

어딜 가나 크게 다르지 않은 보도블록 모양, 담장들,, 크기도 비슷하고 투박한 네모난 간판들, 저마다 비슷하게 생겼고 색도 비슷한 아파트들. 층마다 다른 색이면 즐거울 텐데, 가게의 개성을 아예 드러내는 간판이거나 한 건물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간판이면 좋을 텐데, 길거리가 단조롭지 않고 조금만 더 예쁘면 어떨까. 자동차들은 왜 다 비슷하며 왜 대부분 무채색일까 하는 물음이 마음에서 계속 나왔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다 똑같은 교복을 입었다. 그럴 때 아이들은 개성을 뽐냈다. 같은 신발이라도 위에 장식을 달든지, 조금 특이한 색의 외투 입는다든지 하는. 하지만 살색이나 검은색 스타킹은 신으면서 회색이나 보라색 스타킹은 신지 않았고 중고등학교 다니는 내내 반스타킹을 신은 친구는 한 명도 못 봤다. 저마다 다른 백팩을 들고 다녔지, 숄더백이나 에코백을 책가방으로 들고 다니는 아이는 흔치 않았다. 플리스나 패딩은 입었지만 털이 부숭부숭한 재킷이나 곰돌이 모자가 달린 후드 집업을 입진 않았다. 조금이라도 튀는 모습이거나 행동을 하면 ‘나댄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학생들이 같은 교복을 입으며 저마다 개성을 드러낸다고 하지만 사실 다 어느 정도의 틀 안에서 고만고만한 옷과 신발, 소품을 착용했다. 어느 정도의 일정한 울타리 안에서 자신을 나타낼 뿐이었다.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다르게 자랐을 이들, 혹은 같은 조건에서 함께 자랐어도 각자의 감정과 판단으로 순간순간을 받아들였을 고유한 개인들은 그렇게 다들 비슷한 모습으로 속마음을 덮고 어른으로 자라났다.

그 속으로 나는 분홍색을 칭칭 두르고 나갈 때가 많았다. 아무렇지 않게 가리키는 틈에서 원래 분홍색 인척 당연하듯 있었지만 마음은 잔뜩 발그레 물든 채 뜨거웠다.  옷도 신발도 분홍색이 가득했지만 실은 몇 번 입지도 않고 버려지던 것들, 옷장에 고이 모셔두던 것들도 많았다. 분홍을 걸치려면 용기도 함께 갖고 나가야 하는데 그 정도의 용기가 생기지 않은 존재들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튀는 모습은 눈치 보이고 민망하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한 그런 인식이 만연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우리'는 어떤 '우리'를 말하는 걸까. 여름철 나시와 레깅스를 입고 다니는 사람, 길거리에서 드레스를 입는 사람, 해수욕장에서 겉옷을 걸치지 않고 비키니만 입고 있는 사람, 지하철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사람은 ‘우리’가 아닌 것만 같다.


그래도 점점 더 그런 모습이 많이 보이고 있다. 분명 좋아지고 있다. 앞으로 더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걸어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유럽에 가면 나만 낯선 한국인 같지만 한국에선 당연하다는 듯 나라를 인식하지 않고 다니는 것처럼. 누구의 시선도, 누구의 말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누구나 길을 지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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