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린 건 아니었지만...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아빠가 암 환자라는 현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게 마침내 마주한 현실이었다.
아빠가 폐암 확진 판정을 받으신지 5개월이 지났다.
암 진단을 받기 전 부모님은 아빠의 폐 CT 사진을 들고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찾아가셨다. 또다시 사진을 찍고 초진을 받을 때, 잘 모르는 엄마가 보셔도 지저분한 흰색 흔적이 온 폐를 뒤덮고 있었다고 한다. 엄마께서 폐암이 확실하냐고 물어보자 의사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고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의사는그러면서 아빠의 온 몸을 샅샅이 훑는 정밀 검사를 받으시도록 했다. 폐 뿐만이 아니라는 건...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린 끝에, 결국 폐는 물론이고 뼈와 심장, 뇌에까지 전이되었다는 게 확인되었다. 이는 4기이자 말기 암에 가까워, 의사는 이대로라면 6개월 정도밖에 남은 시간이 없을 것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내렸다.
이미 전이가 될 대로 다 되어 버려 수술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었다. (폐암 중에서 수술이 가능한 경우는 주로 1기 암이라고 한다.) 폐는 차치하고 특히 뇌에 퍼져있는 종양에 관해서는, 한시가 다급할 정도로 그 크기가 커서 최종 검사 결과가 나오자마자 아빠는 방사능 치료실로 직행하실 뻔했다.하지만 그때 의사들 중 한 명이 신중하게 고려해 보자고 막으셨다고 하고, 그래서 방사선과와 호흡기내과 의사들의 의견 충돌과 협의 끝에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고 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아빠는 (폐암 중에서도 악성으로 분류되는) 소세포암이 아니라 비소세포암이었기에 치료해볼 여지가 남아 있었다. 게다가 아빠의 유전자를 검사해서 시중에 나와있는 표적 항암제에 들어맞는 경우인지 테스트를 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 유전자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갔을 때 의사는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처음 미소를 보였다고 한다. 천만다행으로 아빠의 경우는 현재까지 가장 효과가 좋은 표적 항암제를 쓸 수 있는 조건이었고, 일단은 고통스러운 방사능 치료를 피할 수 있었다.
우리의 구원투수로 나선 그 표적 치료제는 바로 '타그리소'라는 약이었다. 제약사는 아스트라제네카로, 그래서 그즈음 코로나 백신 제조사로 이름이 알려지고 남들이 백신 효능으로 아스트라제네카를 폄하할 때 나에게는 누가 뭐래도 그가 빛과 같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여하튼 타그리소의 장점은 폐에 있는 암세포는 물론이고 전이된 암세포, 특히 뇌에까지 침투력이 뛰어나 아빠의 경우처럼 뇌에 크게 자리 잡은 암세포를 제거하는 데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는 것이다. 매일 이 타그리소 한 알을 먹기만 하면 그 약의 성분들이 암세포를 깡그리 죽여버린다니, 멋지다 대단하다! 당장 먹자!! 하지만 의외로 아무나 그 약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한 알에 23만 원이나 하는 비싼 가격 때문이었다.
타그리소라는 약은 원칙적으로 의료 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암 정보를 공유하는 카페에서도 그렇고 의사 또한 1차 치료로 다른 약을 쓰다가 2차 치료로 타그리소를 쓰는 방법이 있다고 권유했다. 그러면 의료보험이 적용돼 약값이 싸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충분한 돈이 있다면 효과가 좋은 약을 뻔히 두고 다른 약을 쓸 수가 없었다. 오히려 한 달에 700만 원 돈으로 목숨을 살 수 있다면 싼 값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약값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작 치명적인 문제는 바로 약에 '내성이 생긴다'는 점이었다. 어느 약이 안 그렇겠냐만은 이 약에도 우리 몸은 내성이 생긴다. 특히 독한 걸 치료하는 독한 약일수록 약 복용을 줄이거나 중지했을 때 갑작스레 이상 증상이 생길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더 이상 약이 효능을 보이지 않으면 표적치료제를 쓸 수가 없고, 그땐 차선책으로 면역치료제를 쓸 수밖에 없다. 이도 저도 안 되면 방사능 치료와 연명 치료를 하게 된다. 그러한 내성이 생길 때까진 약 1년 정도 각오해야 하며 운이 좋으면 2년 정도 약빨이 듣는다고 들었다. 결국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약 또한 말이 치료제지, 완치의 경우는 희박하기 때문에, 길어야 2년을 더 연명할 수 있는 방편이었던 것이다.
이걸 머리로는 알고는 있었다. 다만...
약을 처방받은 뒤로 아빠의 일상은 '거룩한 한 알'과 함께 시작하게 되었다. 믿을 건 이 약 밖에 없었기에,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각에 이 약을 먹는 게 일이었다. 생긴 게 특별하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한 약인데, 이 한 알을 꿀꺽하면 20만 원이 짤랑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게임기에 돈을 넣으면 그 게임이 켜지는 것처럼 아빠의 몸속에선 가상의 전사들이 암세포를 향해 달려들어 피를 튀기는 전투를 벌이는 영화 같은 장면이 모종의 환상처럼 눈앞에 펼쳐지곤 했다.
그렇게 약을 먹기 시작하고 나서 첫 2주 뒤, 아빠는 검사를 받으러 서울 병원에 올라가셨다. 검사 결과, 어떤 눈에 띄는 부작용이나 거부 반응이 없었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6주 뒤, MRI 등의 검사를 통해 뇌와 뼈, 장기에 전이된 부분들을 다시 점검했다. 그러자 정말 다행스럽게도 타그리소는 열심히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많이 좋아진 것이다. 폐에 온통 어지러이 뒤덮고 있던 암세포는 1/3 정도가 줄어들고 뇌에서도 암의 흔적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의사는 농담처럼, 오늘은 맥주 한 잔 하셔도 되겠다며 결과를 칭찬해 마지않았다. 온 가족이 아빠의 검사 결과를 숨죽이고 기다린 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효과가 그토록 좋다는 비싼 약을 매일 먹었으니 경과가 좋을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받아 든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매우 좋았다. 그동안 말과 행동을 아끼시던 아빠는 더욱더 힘이 나셨나 보다. 자신감을 많이 찾으신 듯 보였고 덩달아 우리 집안 분위기가 환해진 것 같았다. 어느새 완치를 기대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조심스러운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두 달이 지났다. 그러니까 그때가 지금으로부터 한 달 전, 이번에도 치료 경과를 보기 위해 다시금 아빠는 검사를 받으러 올라가셨다. 그동안 한 번도 아빠의 병원에 따라가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처음으로 병원에 가 보게 되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여전히 보호자 1인 외 병원에 출입할 수가 없어서, 결국 허무하게 입구에서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내려와야만 했다.
아빠는 그날도 각종 검사들로 마네킹처럼 누워 여기저기 내 몸을 기계에게 맡기며 장장 예닐곱 시간이 넘도록 검사를 받으셨다고 한다. 3시에 시작해 밤 10시가 넘어 검사가 끝났지만 아빠는 피곤하실 텐데도 입원하지 않으시고 곧바로 집으로 오셨다. 실질적인 검사보다 기다리는 일이 일이라는 병원은 그토록 사람을 진이 빠지게 만든다.
서울에서 며칠을 기다렸다가 의사의 진료까지 함께 받고 오시는 스케줄이셨다. (그것도 지방에서 온 걸 어필해야만 검사날짜와 진료날짜의 간격을 좁혀서 겨우 스케줄을 받을 수 있다.) 다행히 이번에도 경과가 좋았다고 한다. 암세포는 저번만큼 눈에 확 띄는 변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차근차근 줄어들고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 서울에 다녀오신 뒤로 엄마는 유독 우울해하셨다. 어떤 간호사 때문이었다.
"경과가 좋아진다고 너무 좋아할 필요가 없어요. 1년밖에 안 가니까."
누군가 무심코 던진 말은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처럼 내려앉았다. 얼마나 수많은 환자들을 경험했을까, 그 간호사는. 수많은 패턴이 반복되었을 것이고 항상 그렇듯 아빠의 경우도 그 수많은 사례들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굳이 꼭 그렇게 묻지도 않은 말을 찬물처럼 끼얹어야 했을까. 그래. 당신 덕분에 씹던 껌 잠시 뱉었다가 다시 차가워진 껌을 씹는 것처럼 곱씹어 본다. 아무리 효과가 좋아도 1년이라는 말, 지금은 나아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죽을 게 뻔~하다는 말처럼 들린다.
점점 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머리로 알고 있는 거랑 실제로 그 아는 사실이 곧 현실이라는 걸 체감하는 것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몰랐던 걸 아는 것보다 아는 것을 인정하는 게 훨씬 더 힘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더 큰 문제는, 그 간호사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외부의 타격이 있더라도 단단한 마음의 근육이 있다면 이겨낼 수 있을 테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의 근육이 풀어져 있기 때문에 그 외부의 타격이 더욱더 크고 아프게 다가온 것 같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일 타그리소 한 알을 먹는 게 온 가족이 챙기는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빠께 "오늘 약 드셨어요?"하고 묻는 일이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매일 아침 8시 30분 정각이 아빠께서 약 드시는 시간이었고 알람까지 맞춰 놓았는데, 어느새 알람은 끄고 약 먹는 시각은 점점 늦춰지더니 이젠 9시 반 '즈음' 먹게 되셨다.
급기야 어느 날은 점심때 아빠와 엄마가 다급히 매직팬을 사러 가자고 하셨다. 그날 아침 약 먹는 걸 깜박하신 거였다. 아빠는 적잖이 충격을 받으신 듯했다. 매일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매일 항암제 한 알 복용'이라는 처방이, 어느새 잊어버릴 수도 있을 만큼 하찮은 일과가 되어 버렸다는 게 말이다. 엄마도 정말 많이 당황하신 것 같았고 나도 아빠께 많이 죄송했다. 결국 그날은 네임펜을 굵은 거 얇은 거로다가 여러 개를 세트로 사서, 약 겉면에다가 날짜와 요일을 일일이 적어놓았다. 그러고도 불안한 마음에 이젠 약 먹고 난 뒤 껍질을 당장 버리지도 않게 되었다.
어느 간호사의 말, 그리고 약을 먹는 걸 잊어버렸다는 사실은, 그 항암 치료 효과를 너무 당연히 받아들이고 안심하고 있었던 날들에 경종을 울렸다. 나날이 나아지고 있음에 감사하였으나, 마치 아빠가 다 나은 것처럼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감사하지도 않게 되며 그저 그런 나날들을 보내며 지내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많이 헷갈린다. 약 효과가 초반에는 너무 좋기 때문에 아빠는 기침을 더 이상 하지 않으셨다. 그토록 질겁하게 만들던 끊임없는 기침 소리가 사라지자, 나는 더 이상 가슴이 무너지지 않고 불안감에 쫓기지 않을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 아빠는 오르막길을 몇십 걸음도 걷지 못하시고 쌕쌕거리셨는데, 이젠 힘을 쑥쑥 내시고 앞장서시는 걸 보면 꼬옥 옛날의 아빠 모습이 겹쳐 보이는 듯했다. 아빠는 정말 이젠 안 아프신 것 같은데? 라며 문득문득 어리둥절한 마음으로나마 위안을 삼았던 것이다.
그런 아빠께서, 사실은 폐암 4기 환자시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고 믿을 수가 없는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내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골라 보았던 걸까. '설마' 하는 마음으로 지금의 평화로운 듯한 일상을 매일같이 흘려보내고 있었다. 곧이어 지진이 나서 땅이 꺼지고 건물이 무너질 게 뻔한데, 나는 그 사실을 알고도 위태롭지만 안락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건물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빠,
정말 어떻게 하면 저는 아빠가 환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까요? 아빠를 살려내는 것도, 약값을 벌어다 드리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현실을 인정하는 그것조차 게을리할까요? 이런 저를 어떻게 하면 혐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암이 갉아먹은 것은 아빠의 육체뿐만이 아니다. 조금씩 조금씩 암은 퍼져 들어갔다. 이번에는 망각이라는 암이 생겨나 악성 종양처럼 자라고 있었다. 나뿐만이 아닌 우리 집 전체에서 여기저기 균열이 생겨나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