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별 Jul 24. 2024

남편이 먹고 싶어서 차린 냉면

우당탕탕 밥상 일기


추억의 평냉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던가, 충무로 근처를 지날 일 있어 필동면옥에 갔다. 오랜만에 추억의 평양냉면을 맛보니 감회가 무척 달랐던 것 같다.


평양냉면에 얽힌 추억이란, 광화문에서 직장을 다닐 때 맘씨 좋은 상사 분들이 신입사원을 데리고 노포 평냉집에 데려가 주셨던 맛있는 기억들이다. 그 근방은 워낙에 유서깊은 동네라 오래된 식당들많았고 특히나 전국에서 이름난 평양냉면집이 많았다. 너무 많아서 생각만 해도 군침이 흐르지만 내가 제일 좋아한 곳들을 꼽자면 곳을 꼽고 싶다. 

을지로 을지면옥 (기본에 충실한 맛)

충무로 필동면옥 (깔끔한 육수가 일품)

남대문시장 부원면옥 (닭무침만 생각하면 꿀꺽)

명동 평래옥 (여기는 초계국수가 대박!)


우래옥, 남포면옥 등이 더 있지만  가격 대비 조금 아쉽다는 평이 있었다. 아무튼 평냉 추억은 여기까지 하자. 필동면옥 냉면은 역시, 오래전 맛보았던 슴슴한 국물 맛이 다시 먹어도 입안에 기분 좋게 촥 감긴다. 고추를 살짝 넣은 국물이 청량하고 깔끔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막상 냉면을 받아들면 순식간에 그릇을 비우게 된다.



냉면 먹고 싶다!


맛있게 평양냉면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폰으로 뒤적뒤적하던 신랑이 갑자기 다급한 소리로 외쳤다.

"벼리 씨, 결제할게요!"

알고 보니 냉면 밀키트를 주문한다는 거다. 그런데 4인분 가격이 무려 32,000원이라고? 너무 비싼 게 아니냐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신랑 왈, 매장에서 사 먹으면 1인분에 16,000원이란다. 음, 그렇게 생각하면 또 싼 것 같기도 하네...? 이의는 보기 좋게 기각당했다.

"네 그러시든가요~"

그러라고 하면서도 머릿속으로 구시렁대었다. '아무리 그래도 밀키트 1인분에 8,000원이라니 너무하네... 얼마나 맛있는지 보자.'


알고 보니 요즘은 없어서 못 먹는다는 봉피양 냉면 밀키트. 하지만 이 링크를 첨부하면서도  절레절레...


남편은 목이 빠져라 냉면을 기다렸다. 이 사람이 이렇게 냉면을 좋아했나 싶을 정도다. 아니면 요즘 밥이 영 맛이 없었나? 그런 생각까지 들면서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나는 썩 내키지 않는 마음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주말 아침부터 웬 용수철처럼 튀어 나가더니 문 밖에서 아이스박스를 들고 왔다. 드디어 냉면이 도착한 것이다.



남편 손맛 좀 보자


본인이 시킨 거라고 냉면을 들고 보여주는 남편의 모습이 의기양양하다. 누가 보면 멧돼지 한 마리 사냥해서 업고 온 줄 알겠다. 아무튼 남편이 그렇게 호들갑을 떠니~ 이쯤 되면 나도 냉면 맛이 궁금해졌다. 안 궁금한 척하고 있었는데, 꺼내놓은 걸 보자 냉면 육수랑 같이 얼갈이절임까지 있는 걸 보고 입에서 군침이 돌았다.


남편은 신중을 기해 면을 삶았다. 지난번에 파스타 면이 너무 덜 익었다며 새침한 조언을 날리던 장본인이다. 냄비 작은 거 큰 거 다 꺼내놓고 냉면을 삶았다. 꼭 예전에 요리하시던 아빠처럼, 이것저것 살림살이 다 꺼내놓고 요리를 하신다. 남자들은 다 그런가.


아빠를 떠올리게 하는 건 그뿐만이 아녔다. 남편은 냉면을 다 삶자, 찬물에 곧바로 씻어야 한다며 빡빡 손으로 치대고 있었다. 꼭 옛날에 아빠 같다. 아빠는 우락부락 둥글둥글한 손을 가지고 계셨고, 국수를 삶고 국수를 씻는 데 진심이셨지. 어찌나 요란하게 국수를 씻으시던지, 국수가 뭉개지는 건 아닌지 걱정될 정도였지만 막상 먹어보면 탱글탱글하기 그지없었다. 참 신기했다. 지금 남편이 냉면을 씻는 것도 꼭 아빠를 닮았다. 


갑자기 신랑 뒷모습이 뭉클하네 진짜...



 


누가 차려준 냉면 한 상


남편은 필동면옥에서 마신 면수가 너무 맛있었다고 그랬다. 애피타이저로 뜨끈한 면수가 나왔는데, 더운 날씨에도 맛있었다. 알고 보니 남편의 냉면 맛집 판별 기준은 면수라고 한다. 어딜 가나 면수를 맛보면서 맛집인지 아닌지 본다고 하는데~ 이번에도 냉면 맛집을 표방하고자 면수를 따로  놨다. 그리고 참, 냉면엔 수육(제육)인데~ 수육이 없으니, 수육대신 오리라고 누가 그랬나? 곁들임으로 훈제오리 팩을 꺼내 간단하게 샐러드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이렇게 차려놓으니 유명한 냉면집 안 가도 냉면 맛집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이다. 오랜만에 다시금 평양냉면을 맛보게 됐다. 그것도 웨이팅 없이, 집에서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생각해 보니, 우리 집 근처에 봉피양 냉면집이 있었다. 그것도 본점...이네? 지난번에 보니까 주차장에 발렛 주차를 하는 승용차들로 붐비던데, 남들은 차 타고 오는 맛집을 가까운 곳에 두고, 냉면을 굳이 밀키트로 사서 집에서 먹고 있으니 좀 웃기기도 하다. 하지만 난 굳~이 집에서 냉면 먹고 싶네. 왜냐고? 남편이 차려주니까!




신랑) 어우, 면수가 좀... 많이 진하네?
나) 쌀뜨물 같고 괜찮은데요?
신랑) 음... 면이 좀... 많이 삶겼구나.
나) 잘 모르겠는데? 냉면 맛있는데요?!
신랑) 휴. 다음에는 더 맛있게 삶아볼게요.
나) 네에~ 전 다 좋아요~~~!
신랑) ㅎㅎㅎ


추신. 생각보다 밀키트는 괜찮았다. 이렇게 충동구매해도 되는건가 싶었는데~ 짜지 않고 달지 않고 담백하고 맛있는 평양냉면 맛이라니. 일반적으로 찰기가 있는 냉면보다 좀 더 투박한 모밀 식감의 면이었다.

남편~ 면 좀 불어도 괜찮아요. 남편 하고 싶은 거 다 해요! 저는... 맛있게 먹을게요. (므흣)


매거진의 이전글 더위에 지친 날 토마토 냉파스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