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넓은 연대, 더 단단한 지속가능성
※ 이 글은 '인사이드 아웃도어' (리리 퍼블리셔)에서 발췌하였습니다.
2015년은 아주 특별한 해였다. 코리아 백패커스 데이(KoreaBackpacker’s Day, 이하 KBD)가 처음 열린 해이기 때문이다. KBD를 기획하면서 나는 기존의 대규모 아웃도어 행사들에 대해서 몇 가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대부분의 아웃도어 관련 페스티벌이 캠핑 중심의 정적인 프로그램이라는 것이었다. 자연 풍경과는 거리가 먼 개활지에 집단 텐트촌을 형성하고 끊임없이 요리 경연대회를 하는 식의 획일화된 행사는 점점 수준이 높아지고 다양하게 분화되고 있는 아웃도어 동호인들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KBD 기획안의 핵심 키워드는 다양한 아웃도어 액티비티의 직접적인 체험이었다. 아웃도어가 텐트 치고 음식 먹고 잠만 자는 것이 아니라 캠핑을 다양한 액티비티와 연계했을 때 더욱 흥미로운 경험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고, KBD는 바로 그런 직접적인 체험의 플랫폼이 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당시만 해도 이렇다 할 백패킹 관련 이벤트가 없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었다. 백패킹은 기본적으로 단출한 장비로 다른 아웃도어 액티비티와 유연하게 연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2015년 전북 진안에서 열린 첫 번째 KBD는 진안고원길의 하이킹과 금강상류에서의 팩래프팅, 그리고 운일암반일암에서의 볼더링을 주요 액티비티로 배치했고, 약 250여 명의 백패킹 동호인들이 참가했다. 비록 체험 수준이었지만 KBD를 통해 그동안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아웃도어 액티비티를 직접 접하면서 야영 중심의 획일화된 아웃도어가 아니라 좀더 풍부한 아웃도어 라이프를 즐길 수 있는 포털의 역할을 기대했다. 액티비티 프로그램을 진행해준 전문가들도 KBD의 취지를 잘 이해해주었고, 재능기부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행사에 동참했다. 서로 분야가 달랐지만 아웃도어 동호인으로서의 연대의식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웃도어 리더쉽이 향상되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카약과 트레일 러닝, 트레드 클라이밍, 오리엔티어링, 지오캐싱, SUPStand Up Paddle 등의 액티비티가 추가되어 한국에서 즐길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액티비티들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KBD에는 아웃도어 관련 업체들이 제품을 소개하는 부스도 마련했다. 새로운 제품을 동호인들이 직접 보고 정보를 얻는 것도 페스티벌의 중요한 콘텐츠였다. 이때도 몇 가지 남다른 원칙이 있었는데 다른 브랜드의 제품을 카피하는 업체는 참가할 수 없으며, 오래된 재고를 땡처리하기 위해 부스를 운영하는 것도 금지시켰다. 우리나라의 아웃도어 관련 전시회는 흔히들 재고를 처리하기 위해 참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전시회의 격을 떨어트리는 일일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아웃도어 산업 전체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전시회는 전시회답게 브랜드 스토리와 신제품을 소개하는 플랫폼이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나는 KBD가 재고떨이하는 난전으로 변질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아웃도어 비즈니스의 특징으로 이해관계자들 간의 남다른 유대감을 제시했는데 이는 당연하게도 아웃도어 관련 업체들도 포함하는 이야기다. 나는 참가업체 관계자들에게도 KBD의 일반 참가자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 운영을 요청했다. 예를 들어 리페어 킷을 판매하는 곳은 참가자들의 장비를 수선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했으며, 트레일 러닝화 업체는 초보자를 위한 트레일 러닝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식이었다. 이런 내용적인 결합이 축적되는 과정이 곧 아웃도어 문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KBD를 기획하고 운영하면서 무엇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행사 전체 일정에서 친환경 정책을 관철시켰다는 것이다. 우선 참가자들에게 페트병에 든 생수 사용 자제를 요청했고, 좀더 ‘급진’적인 친환경 운영 정책으로는 행사장 내에 쓰레기통을 없애고 개수대에서 설거지를 금지시킨 것이었다. 쓰레기통이 설치되는 순간 수많은 쓰레기들이 분리되지 않은 채 쌓일 것은 불을 보듯 뻔한 노릇이었다. 더 심각한 것은 음식은 다른 지역에서 구입하고, 소중한 공간을 내어준 지역에는 쓰레기만 버리고 가는 것이었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자기가 가져온 쓰레기는 고스란히 자기가 되가져 가서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이었다. 이것은 내가 오랫동안 주장해온 ‘공정 백패킹 윤리지침’과도 부합되는 일이었다. 이 운영 방침은 일부 참가자들에게 원성을 사기도 했지만 여느 캠핑 대회와는 달리 ‘백패킹’이라는 타이틀을 건 행사였으므로 설거지를 하지 않고, 쓰레기도 되가져 가는 약간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함을 설득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개수대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음식 쓰레기와 쓰레기통에 넘쳐나는 온갖 쓰레기들이 우리가 그동안 보아온 캠핑장의 불쾌한 아침 풍경이었지만 KBD 행사장의 아침은 달랐다. 참가자들은 자신이 가져온 쓰레기를 모두 배낭에 다시 넣었으며, 남은 음식물조차 되가져갔다. 참가자들은 스스로도 놀라워했다. 행사장은 수백 명이 모여서 캠핑을 했던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깨끗했고, 참가자들은 이 변화의 큰 흐름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뿌듯해 했다. 사람들은 이미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변화는 때로 트리거가 필요하다. 나는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는 골목길에 꽃을 놓아두자 사람들은 더 이상 쓰레기를 버리지 않았다는 일화가 떠올랐다. 한 달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한마음으로 행사를 준비하고 무사히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스태프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다. 수백 명이 모이는 대형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해본 경험이 전무했지만 행사의 기조와 방향이 명확했기 때문에 그나마 해낼 수 있었다. 행사의 기획과 운영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철학과 원칙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행사가 끝나고 참가자들이 돌아간 텅 빈 행사장에서 스태프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쓰레기를 수거했지만 몇 년이나 지났을 오래된 쓰레기를 포함해서 한 주먹도 안 되는 작은 쓰레기만을 모았을 뿐이었다. 쓰레기는 적었고 우리 모두의 마음은 커졌다. KBD를 마치고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나는 ‘Pride ofBackpackers’라는 배너를 웹사이트 초기 화면에 게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