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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스크라 Apr 23. 2021

지속가능한 아웃도어(1)

사라져간 벗들을 애도하다.

※ 이 글은  '인사이드 아웃도어' (리리 퍼블리셔)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아웃도어의 지속가능성

근사하면서 윤리적이기까지 한 느낌을 주는 ‘지속가능성’[1]은 최근 마케팅 담당자가 가장 선호하는 단어의 하나인 듯하다. 나쁘지 않다. 그린마케팅 유행에 편승해 갑작스럽게 환경주의로 개종했다고 해도 지속가능성에 도움이 된다면 그건 긍정적인 일이다. 다만 지속가능성이 무엇이고,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좀더 진지하게 성찰한다면 더없이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럼 도대체 지속가능성은 무엇이고, 지속가능한 아웃도어는 무엇일까?

지속가능성은 생태계가 미래에도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균형 있게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생태계의 미래유지가능성’이 핵심개념이다. 지속가능성 개념은 환경뿐 아니라 사회 경제 문제로 확장해서 적용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어 ‘지속가능한 발전’ 개념이 그것이다. 1992년 리우 환경 회의 이후 UN은 ‘지속가능한 발전’이라는 개념을 제안했으며, 이후 지속가능성이라는 용어는 유행처럼 번져 기업 차원에서는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이들 개념은 20세기 이후 급격하게 늘어난 인간 활동에 따른 지구 생태계의 파괴를 막고, 인간과 자연 생태계의 조화 속에서 미래 인류가 생존할 수 있다는 애초의 문제의식에서 조금 벗어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물며 이윤 극대화를 위한 방법론으로 제시되는 ‘지속가능한 성장’은 전혀 다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경험하지 못한 재앙

19세기 사냥을 좋아하던 영국의 귀족들이 여우와 토끼를 오스트레일리아에 들여왔다. 사냥 취미를 위해 들여온 영국의 여우와 토끼는 얼마 가지 않아 오스트레일리아의 생태계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 왔는데, 여우는 진화적인 경험이 전혀 없었던 오스트레일리아의 토종 포유류와 조류를 닥치는 대로 잡아먹었고, 번식력이 대단했던 야생 토끼는 토종 초식동물들과의 먹이 경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다. 더구나 크게 늘어난 토끼의 개체수는 양과 소의 사료로 사용하던 식물을 급속도로 먹어치우면서 목축 산업에도 큰 손실을 가져왔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풀이 사라진 토양은 비를 머금지 못해 점점 황폐해지면서 생태계에 일대 교란이 일어났고, 오스트레일리아 국토는 전대미문의 환경 재앙을 맞게 되었다.

토끼를 막기위해 만리장성보다 긴  3,256km 울타리를 설치했다. (사진: 지식채널 e '페스트')

징후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무의 껍질이 벗겨지고 메마르면서 뿌리가 점점 드러나는 나무들, 점차 개체수가 줄기 시작한 토착 생물들, 그리고 마침내 황폐화된 목초지와 목장을 버리고 하나둘 떠나는 인간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뒤늦게 재앙의 원인을 파악하고 대응에 나섰다. 150여 년 전에 들여온 토끼는 불과 24마리였지만 60년 후에는 무려 100억 마리로 늘어났다. 목초지를 보호하고 토끼를 고립시키기 위해 3,256km에 이르는 울타리를 설치하기도 했으며, 토끼를 퇴치하기 위해 생물무기의 일종인 바이러스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6년 후 바이러스에 내성이 생긴 변종 토끼가 등장해 다시 극성을 부렸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의 목표는 토끼가 존재하지 않았던 150여 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다.


사라져간 벗들을 애도하다

외래종 토끼 몇 마리가 드넓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초원을 50년 만에 황폐화시킨 일은 인간의 과도한 자연 개입이 예상치 못한 재앙을 불러올 수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면, 양쯔강 돌고래는 인간 활동 그 자체만으로도 다른 생명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까지 5,000여 마리 수준이었던 양쯔강 돌고래가 중국의 산업화로 양쯔강이 전력 생산과 수송 통로로 이용되고, 어류 남획까지 더해져 10여 마리로 줄어드는 데는 불과 50여 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2006년 결국 양쯔강 돌고래는 멸종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고, 그 이듬해인 2007년 부랴부랴 ‘돌고래의 해’를 선포하여 이미 사라진 돌고래를 기념했다.

한때 50억 마리였던 여행 비둘기는 20세기 초 멸종하였다.

더 비참한 사례는 미국의 여행 비둘기[2]다. 19세기 중반 50억 마리로 조류 단일종으로는 지구에서 가장 많은 개체수로 추정되던 여행 비둘기가 노동자들의 값싼 식량과 부자들이 놀이 삼아 즐기던 사냥으로 불과 수십 년 만에 멸종되었다. 누가 한 번에 가장 많이 잡는지 내기까지 벌어졌고, 한번에 800마리를 잡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저 사람들은 유희삼아 여행 비둘기를 사냥했다. 여행 비둘기가 무리지어 이동할 때는 하늘을 다 덮었다지만 그 많던 개체가 이토록 짧은 시간에 멸종되리라고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개체수가 급격하게 줄기 시작한 1907년 뉴욕시는 여행 비둘기를 사격장의 산 표적으로 쓰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이미 멸종으로 향한 임계점을 넘어섰고, 결국 1914년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사육되던 마지막 개체가 죽으면서 완전히 멸종했다.

인간에게 발견된지 불과 27년만에 멸종한 스텔러 바다소

대형 바다 포유류였던 스텔러 바다소[3]의 경우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아주 짧은 시간에 멸종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덴마크 출신 탐험가 비투스 베링이 이끄는 캄차카 탐험대가 1741년 코만도르스키 제도의 무인도인 베링 섬에서 좌초되었다. 탐험대의 반 이상이 죽고 생존한 탐험대의 일원인 게오르그 빌헬름 스텔러Georg Wilhelm Steller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그 섬에 살고 있던 거대한 바다소의 존재가 포함되어 있었다. 고기는 송아지 고기 맛이었으며, 기름은 아몬드 기름 같았고, 가죽은 고급 모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그의 관찰기는 금세 소문이 퍼져 모피 상인과 사냥꾼들이 베링 섬으로 몰려들었다. 1768년 마지막 남은 바다소 두 마리를 죽였다는 보고가 있었는데 그게 스텔러 바다소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 동료들이 사냥당하는 중에도 동료애를 발휘하여 곁을 떠나지 않다가 오히려 집단으로 도륙되었다는 스텔러 바다소가 인간에게 알려진 후 멸종하기까지는 불과 27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1] Sustainability. ‘지속가능성’이라는 용어는 1713년 독일의 회계사이자 광업 관리자였던 칼로비츠(Hans Carl von Carlowitz, 1645-1714)가 임업 분야에 처음 도입했다.

[2] Passenger Pigeon. 북미 대륙에 서식하던 야생 비둘기로서 1800년대 중반 50억 마리 이상이 서식했지만 식량과 사료, 졸부들의 사냥 놀이 등을 위해 남획되면서 불과 50여 년 만에 멸종되었다.

 [3]Steller’s sea cow(학명: Hydrodamalis gigas). 바다에 사는 포유류의 일종으로, 해우목, 듀공과)에 속한다. 북태평양의 베링 해 코만도르스키예 제도에 서식하고 있었으며, 몸길이 8~9m, 무게는 10톤에 달해 고래 다음으로 큰 포유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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