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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스크라 May 31. 2021

브랜딩 vs. 마케팅 (2)

2011년, 제로그램의 출발

※ 이 글은  '인사이드 아웃도어' (리리 퍼블리셔)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만인을 위한 브랜드는 없다.

제품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만인을 위한, 만인의 브랜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브랜드가 있을 수 있을까? 국민 브랜드라고 일컬어지는 상표가 정말 브랜드일까? 브랜딩은 스토리에 참여하고 이를 통해 소비자들이 스스로 브랜드가 되는 과정이다. 나의 이런 생각 때문에 더러는 논쟁에 휘말리기도 했고, 브랜드 지지층을 좁히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그런데 브랜드 지지층을 넓히는 것은 의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에게 아첨을 늘어놓는다고 모든 사람이 지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제품이 잘 팔린다고 비슷한 제품을 만들거나, 남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마케팅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나와 함께 일했던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마케팅 관련 서적에서 제시한 방법대로 기획안을 작성하면 나는 반려하기 일쑤였다. 특히 나는 마케팅 관련 서적을 믿지 않았다. 대부분의 마케팅 서적은 이미 일어난 결과들을 분석해 먹기 좋은 상태로 방법을 제시한다. 과정에 대한 다양한 변수들은 생략되고, 성공과 실패를 단순하게 정형화시키기 때문에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우리가 제시하고 실천하려는 가치관에 부합되는지도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진정성 마케팅-먼저 실행한 다음 약속하라!

제로그램의 대표적인 슬로건이자 브랜드 철학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했던 ‘Sorry Earth’를 이야기할 때 공허한 마케팅 용어가 아니라 정말 지구에게 미안한지, 그리고 지구 환경을 위해 아웃도어 제품 제조사로서 무엇을 더 노력해야 하는지 거듭해서 되돌아 보았고, 혹시나 개선해야할 것들은 없는지 수시로 살펴보았다. 진정성이야말로 브랜드가 고객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서비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초창기 제로그램 브랜드 철학, Sorry Earth


그런데 진정성 마케팅의 핵심은 무엇이고, 진정성은 어떻게 측정할 수 있으며, 측정 지표는 무엇인지를 두고두고 고민했다. 그저 오랜 시간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지, 보다 명쾌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한 가지 의미 있는 사례를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미국의 세이프웨이(Safeway) 슈퍼마켓 체인의 유기농 매장 운영 사례가 그것이다. 그들은 매장 내의 식재료를 유기농 제품으로 변경했는데 이로 인한 판매가 상승으로 고객들은 외면했고, 높은 원가 때문에 수익성이 점점 악화되었다.

그러나 세이프웨이는 유기농 제품으로의 변화 정책을 바꾸지 않고 3년간 지속적으로 실천했고 마침내 고객들은 그들의 ‘진정성’을 믿기 시작했다. 세이프웨이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먼저 실행하고, 그 다음에 약속하라! Deliver, then promise!”라는 진정성 마케팅의 명언이 등장했다. 그렇다. 고객이 알아줄 때까지 일관되게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성이다. 객관적인 지표로 정량화하는 것에만 익숙하다면 이미 진정성 마케팅은 시작하지 않은 것이다.


진정성과 관련된 적절한 사례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LNT 원칙을 국내에 널리 알린 것에 나는 약간의 자부심이 있다. LNT 후원을 시작한 것은 2011년 제로그램을 시작하던 해였다. 지금은 아웃도어 동호인들의 환경의식이 많이 높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환경 아젠다는 전혀 관심 밖이었다. 아웃도어 관련 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한창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었을 때라서 그들은 매출 극대화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을 뿐 그들이 만든 제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아웃도어 문화는 어떤 방향으로 만들어지고 있는지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쏘리 어스’라고 얘기했을 때 지구에게 미안하다면 산에도 가지 말라는 일부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나는 환경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지 않으면 문화도 비즈니스도 공멸할 수 있겠다 싶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이제 LNT는 누가 주도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대부분의 아웃도어 활동에서 기본적인 활동 원칙이 되었다. 나는 이제 특별히 LNT를 얘기하지 않아도 되는 시점이라고 생각했고 스토리텔링에서도 LNT를 언급하는 수준을 낮추었다. 사람들이 스스로 실천하고 있었으므로 우리의 역할은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자존감을!

앞서 나는 진정한 브랜드 소비는 브랜드 스토리에 참여하는 과정일 뿐 지출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이를 통해 스스로 브랜드가 되는 과정이라고 했다. 결국 이것은 브랜드를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 모두에게 자존감이 주어져야 가능한 일이다. 나는 제품의 판매뿐 아니라 사업의 전 영역에서 ‘모두의 자존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진정성 마케팅 역시 모두의 자존감을 존중했을 때 가능하다.


이런 나름의 원칙은 엠버서더 정책에서도 적용되었다. 내가 근무할 당시 제로그램의 엠버서더 정책은 아웃도어 전문가의 경험과 모험을 존중한다는 원칙 아래 수립되었다. 그래서 팀 제로그램을 소개할 때 “진정성 있는 아웃도어 활동과 어드벤처를 지지하며, 이들의 경험담을 여러분과 나눈다”고 했던 것이다. 특별히 제품에 대한 우호적인 리뷰를 포스팅하거나 브랜드 노출을 의무화한다는 계약 따위는 아예 없었다. 이른바 인플루언서 마케팅 수준에서 그들을 대한다는 것은 그들의 큰 모험에 대한 모독이다. 고객이 우리의 자존감을 돈으로 살 수 없듯이 우리 역시 때로는 목숨을 걸고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아웃도어 전문가들의 자존감을 돈으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형편이 좋았다면 더 크게 그들의 모험을 지원하고 아웃도어의 지평을 넓힐 수 있었을 텐데, 지나고 보니 무척 아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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