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걸 상기하며 잊혀가는 것들 잡기
가을학기 개강한 후로 정신없이 지내고 있다. 학생들에게는 쉽고 교감 있는 수업을 해야 하고, 선생님들과는 행정적인 소통을 잘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겐 평가가 되기에 치열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허술한 모습만 보여서 전문적인 모습을 어필하고 싶거든. 매일 두들겨 맞은 듯이 아파서 하루는 죽은 듯이 잠만 잔다.
어제도 하루 종일 자고 주말을 맞이했다. 이번 학기는 4일만 수업이 있기도 하고 수업은 반복적으로 했던 것들이라 수업 준비시간이 많이 줄었다. 개인적인 시간이 생겼다. 취미 생활을 하려고 통유리로 된 카페에 왔다가 그만 노래와 경치에 심취해버렸다. 갑자기 감성적인 것들을 좇다가 좋아하는 이웃님 블로그에서 멈췄다. 바디 스크럽을 올리시고 틈틈이 생각을 공유해주시는데 너무 좋다. 언젠가 이런 글을 쓰셨다.
연예인 같이 치열한 바닥에 있다 보니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며 아득바득 이를 갈면서 살고 있었다. 내가 누린 것들은 뭐가 있을까? 좋아하는 게 많지 않은 나는, 몇 가지를 골라놓고 오랜 시간 좋아하는 편이다. 그중 5가지를 꼽자면 이웃님이 추천해주신 바디 스크럽이다. 예민하고 지쳤을 때 바디 스크럽을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몸에서 나는 은은한 향과 노곤 노곤함을 핑계로 게을러도 괜찮은 시간이 좋다.
두 번째로는 커피다. 19살부터 카페에서 알바를 한 이후로 아메리카노를 좋아하게 됐다. 향이 좋고 산뜻한 커피가 주는 즐거움을 놓을 수가 없다. 좋아하는 친구랑 같이 갔던 카페에 혼자 갔다. 드립 커피 전문점인데 커피에 노력을 쏟는 건 처음 봤다. 원두를 가는 순간부터 계량기로 정확하게 그람수를 재고, 정확한 물 온도에 맞춰 내려지는 커피. 딱딱해 보이지만 정성 없이는 만들 수 없다. 커피를 기다리는 시간이 좋았다. 차를 마신 것처럼 깔끔한 맛은 오랜만이라 더 좋았다. 세 번째로는 유학시절부터 좋아하게 된 디저트다. 맛있는 케이크 한 조각이면 스트레스가 풀린다.
네 번째로는 음악이다. 잔잔한 분위기의 음악을 좋아한다. 공부할 때, 일할 때,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긴장을 놓을 수 있게 해 줘서. 일이나 공부를 하면 긴장된다.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박처럼 들면서 몸이 굳어진다. 그런 순간에 필요한 건 음악이다. 일주일 넘게 같은 노래만 듣다가 친구가 바꾼 프뮤를 들어버렸다. 사실, 이 노래 하나로 감상을 쫓다가 브런치까지 왔다. 해야 할 일들은 몽땅 잊어버린 채. 가사가 말하는 것들이 나를 가리키는 거였으면.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몰라 노래를 택하기도 한다. 자주 그러는 편인데 얘도 나와 같으면 좋겠다.
저번 글에도 썼지만 얘는 나랑 친구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내다가 인지하지 못할 때 감정이 바뀌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해. 지금보다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다고. 더는 숨기기 어려운 마음을 알아주면 좋겠다고. 실제로 만나면 평소랑 똑같아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쩌다 마주친 눈빛에 뭔가 있다고 믿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건 나를 볼 때의 친구의 눈빛이다. 다정해서 눈빛 안으로 빠져버릴 것 같아. 주변이 안 보이는 건 당연하고 친구의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 따위도 안 보인다. 눈빛만 보여. 완전히 빠져서 계속 보고 싶은 눈. 난 걔의 눈이 참 좋다.
난 내가 가진 게 없다고 생각한다. 월급이 많지 않고, 주변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은데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좋아하는 것들을 상기해보니 가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고 있던 걸까? 생각이 문득 들었다. 치열하게 하루를 버티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가까이하고 싶어서였다. 아무것도 없으면 좋아하는 것보다 생존이 더 중요해지니까, 책임을 갖고 마음껏 좋아하고 싶었다.
부족함을 채우려고 할수록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가까워지기는 커녕 멀어져 가는 것만 같다. 일에 집중할수록 뭔갈 놓쳐버리는 꿈을 꾼다. 열심히 살수록 상실의 감정이 느껴진다. 아무것도 책임지지도 못한 채 내 몸 하나 겨우 건사하고 있는데 정말로 그럴까. 좋아하는 것들은 이렇게나 분명한데.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이런 것들이지 않을까? 충분히 쉬면서 좋아하는 것들을 가까이하는 일상. 작년 여름 이후로 아득바득 살아왔으니까 이 정도의 틈은 줘도 되지 않을까?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과가 이 정도라면 더 이상의 진전은 노력과는 별개 같다.
지금 카페에서 바깥 경치를 보고 있다. 여유를 충분히 느끼고 싶다. 치열한 삶을 버티게 해주는 영감이 되니까. 뜬금없는데 크리스마스는 화려하게 보내고 싶어졌다. 좋아하는 이웃님이 그러셨듯 나도 똑같이 보내고 싶다. 크리스마스에 전혀 감흥이 없는데 화려하고 쓸데없는 것들을 사고 싶어졌다. 똑같은 하루를 소중하게 보내고 싶어졌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 이왕이면 걔랑 같이 보내고 싶다. 친구가 내년에 유학 가면 나도 여행 갈 건데 크리스마스 시즌에 가고 싶다. 나랑 다른 듯 똑같은 친구도 같은 마음이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