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말 잘 듣는 착한 딸
학창 시절 친구들의 기억에 나는 꽤나 모범생으로 기억되는 듯하다. 공부를 특출 나게 잘하지는 않았지만 반에서 튀지 않았고, 생김새만으로는 전교 1등 같은 외모였다. 끼리끼리라는 말이 괜히 있지 않듯이 나는 내 이미지와 비슷한 친구들과 주로 어울렸다.
부모님이 주변에 나를 말 잘 듣는 착한 딸로 소개하는 게 듣기 좋았고, 그게 최고의 칭찬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나 하고 싶은 것보다 칭찬을 듣기 위해 노력했다. 무엇보다 부모님이나 선생님 말을 거스르면 커서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인생이 그렇게 공식처럼 흐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건 어리석게도 사회생활을 하고 나서였다.
교실 뒷자리에 몰려다니며 늘 선생님께 불려 가 문제아로 혼나던 친구들 중 몇몇은 일찍이 본인이 잘하는 분야를 직업으로 삼아 사업가로 성공했다. 매일 수업시간에 낙서와 그림을 끄적이던 Y는 웹툰작가로 성공을 했고, 교복을 너무 타이트하게 줄여서 선생님들 눈을 피해다느라 바쁘고 거울만 보던 H는 핫한 인터넷 쇼핑몰 사장님이 되었다. 야자 시간을 빼먹고 아이돌을 쫓아다니던 M은 결국 연예인 소속사에 스태프로 들어가 성덕이 됐다고 한다.
가시적인 성공이 내면의 행복까지 보장할 수는 없겠지만 이들은 적어도 본인이 원하는 삶을 주체적으로 산 결과를 결실로 맺은듯하다.
그럼 엄마 말 잘 듣던 나는? 성적에 맞춰 대학을 들어가고, 부모님 덕에 늦은 나이에 유학을 가 학벌세탁을 하고 한국에 돌아와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그리고 십 년 뒤 불미스러운 일로 휴직을 하고 집에서 애를 보고 있다...
나는 20대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내고 한국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한동안 가치관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누군가? 세상에 잘난 사람이 이렇게 많고, 돈 많은 사람도 이렇게 많구나. 세상이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공평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괜히 주눅이 들기도 했고, 마음속 깊은 곳엔 자격지심이 꿈틀댔다.
연애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사랑 타령하며 낭만을 꿈꿨지만 결혼적령기가 되어 만나는 남자들은 나의 직장과 유학생활 등, 언뜻 보면 모자랄 것 없어 보이는 나의 배경에 다른 기대를 품는 듯했다.
이런 열패감은 결국 서른이 넘은 나에게 큰 사춘기를 선사했다. 모든 불만이 내가 자라온 환경 탓인 것 같았다. 못난 딸은 다 큰 성인이 되어서 불효를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불현듯 말없이 집을 나와 독립을 했고, 작정하고 부모님의 기대하는 바와는 정반대의 행동을 했다. 착한 딸 칭찬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됐다. 그렇게 서른 살을 넘어 3~4년을 격동의 사춘기를 보냈다.
그러던 중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주말부부가 되어 죄인처럼 부모님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내 자식을 키우며 철이 든 건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도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분했고, 악을 쓰며 화가 났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았다. 부모님도 매 순간 당신들 나름의 최선을 다해 외동딸을 키우셨을 뿐이다.
다행히 지금은 그 어느 때 보다 효녀로 살고 있다. 내 주변 사람들, 가족들이 하루하루 무탈하고 즐겁게 보내는 것도 내가 찾는 행복 중 하나다. 내가 나인걸 성내서 뭘 어쩌겠다고 혼자 힘들어한 시간에게 위로를 보낸다.
그리고 나는 마흔이 넘어 이번엔 사회에 크게 실망하고 또 다른 사춘기를 맞았다. 혼자 허공에 냥냥펀치를 날리다 지금은 소소한 일탈을 즐기고 있다.
무엇보다 내 멋대로 살고 있다.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번갈아 보기도 하고, 무작정 밖으로 나가 지하철을 타고 종점을 다녀오기도 한다. 영화관에서 영화 두세 편을 연달아 보면 하루가 간다. 어제는 미용실에 가서 처음으로 탈색을 했다. 샛노란 색을 거쳐 회색빛으로 물들어가는 머리를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사춘기가 다시 왔다고 했지만 처음보다 힘들지 않다. 전보다 단단해진 마음으로 등원과 하원사이 자유가 된 도비를 응원하니까. 내 인생 일탈의 총량에 어느 수위까지 온건진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