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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Mar 13. 2021

할머니와 쪽파의 눈치싸움

외갓집에서 미리 만난 봄






오랜만에 외갓집을 다녀왔다.


경남에 있는 외갓집은 우리집보다 훨씬 남쪽이라 봄이 한 달 정도 빠르다. 아직 황량한 우리 동네와 달리 이곳의 들판은 알록달록했다. 산수유와 매화는 물론이고, 냉이꽃도 피어있었다.




할아버지의 논이 제법 푸르다. 지난가을에 벼를 베고 뿌려둔 밀이 파릇파릇 돋아났다. 마치 잔디가 깔린 것 같다. 우리집 주위 풍경과는 사뭇 다른 초록빛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렇게 심은 밀은 모내기를 하기 전에 베어 이웃집 소에게 먹일 식량이 된단다.


논 한편엔 쪽파와 마늘이 자라고 있다. 이른 봄에 돋아나는 쪽파는 유독 달고 맛있다. 며칠 전부터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파가 났능교?” 몇 번이나 물었다고 한다. 여리고 맛있을 때 뽑기 위해 쪽파와 눈치싸움을 벌였는데, 봄비를 맞고 갑자기 쑥 자라는 바람에 시기를 놓쳤다고 했다. 외갓집 마당에 그 눈치 없이 자라 버린 쪽파가 한 줌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저녁 찬거리였다.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쪽파를 다듬었다. 나는 할머니와 재료를 다듬는 시간이 정말 좋다. 할머니의 손길은 언제나, 많이 느리다. 하나하나 천천히, 느릿느릿...... 한 줌 푸성귀를 다듬는데도 시간이 꽤 걸린다. 할머니의 속도를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무 말 없어도 그저 편하다.


“저거 니 가가면 된다.”


쪽파를 다듬던 할머니가 평상 위를 가리켰다. 커다란 비닐봉지에 쪽파가 가득 담겨 있었다. 눈치싸움 벌였다는 파가 다듬던 게 아니라 이거 였구나...... 겨울초, 혹은 동초라 불리는 유채도 한 봉지 가득 있었다. 대충 봐도 엄청 많았는데, 전부 말끔히 다듬어져 있었다. 날 위해 느린 손으로 한참을 다듬으셨을 테지...... 내가 하면 되는데 참......




집에 돌아와 쪽파를 데쳐서 할머니가 만든 꿀고추장에 버무렸다. 남은 쪽파론 파김치도 만들었다. 유채는 꼭 왜간장을 써서 겉절이를 해 먹으라는 할머니의 말을 따랐다. 데친 쪽파 무침은 달큼하고 부드러웠다. 할머니가 봄마다 해주시던 그 맛 그대로다. 유채 겉절이는 끝에 살짝 알싸한 맛이 감도는 밥도둑이었다.


제철 음식, 특히 초봄에만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주는 기쁨은 크다. 할아버지 할머니 덕에 일찍이 봄을 맛볼 수 있었다.




외갓집 동네는 봄까치꽃 푸른 고개가 툭툭 떨어지고 한봄으로 접어들었다. 우리집 주변엔 냉이꽃이 피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곳에도 봄이 도착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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