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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Apr 19. 2022

접시 위에 내려앉은 봄 풍경

갓꽃 파스타


우리 집은 높이 삼백 미터가 넘는 산 중턱에 있다. 뒤편으로 숲이 병풍처럼 집을 둘러싸고 있는데 나는 이곳을 ‘서쪽 숲’이라고 부른다. 숲까지 걸어서 채 일 분이 걸리지 않으니 숲 속에 사는 거나 다름없다. 서쪽 숲에는 많은 동물이 살고 있어서 종종 반가운 친구들을 마주치곤 한다. 다양한 새와 다람쥐, 청설모 같은 작은 동물부터 커다란 노루와 고라니도 있다. 가끔은 우리 집 마당까지 내려오기도 한다.


늘 자연 속에 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산을 곁에 두고 살 줄은 몰랐다. 시골살이를 꿈꿨던 우리는 남편의 이직을 기회로 삼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남편 회사 가까이에는 읍 소재지와 혁신도시가 있지만, 우리는 조용한 시골 마을에 있는 집을 선택했다.


마당에서 바라본 서쪽 숲


4월의 어느 날, 모처럼 미세먼지 없이 하늘이 맑다. 봄바람이 가볍게 부는 오후 남편, 까미와 함께 마당에 앉아 햇살을 쬐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긴다. 서쪽 숲을 바라보니 버드나무에 여린 잎과 함께 연두색 꽃이 피어 있다. 그 옆에서 산벚나무도 꽃망울을 터 뜨리고 있다.


“꽃도 볼 겸 서쪽 숲으로 산책하러 갈래?”


“꽃도 볼 겸 서쪽 숲으로 산책하러 갈래?”

“좋아!”


눈이 녹아내리자 자연스럽게 드러난 숲길을 지난겨울부터 눈여겨봐뒀다. 그동안은 서쪽 숲 가장자리를 따라 걸었는데, 그 길은 숲 안쪽으로 이어진다.


물이 마른 계곡을 따라 난 산책길은 사람이 오래 다니지 않았는지 길이 험했다. 지난 계절의 흔적이 낙엽이 되어 쌓여 있고, 그 사이로 이름 모를 풀들이 가득 나 있다. 가시가 있는 넝쿨이 길을 막아서기도 했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저 멀리 숲 사이로 보이는 산벚나무를 향해 홀린 듯 걸어갔다.



좁은 길을 지나니 갑자기 공간이 확 트였다. 와, 소리가 절로 나왔다. 산벚나무가 가득하다. 작은 산벚나무와 오래된 산벚나무가 여러 그루 겹쳐져 있다. 키가 큰 산벚나무가 만든 꽃가지 지붕 사이로 듬성듬성 햇살이 쏟아졌다. 따뜻하고 다정한 봄바람에 산벚꽃 가지가 아름답게 너울거린다. 동화 속 세상이 이럴까…….



우리 둘 다 말없이 조용히, 오랫동안 그 풍경을 눈에 담았다. 세찬 바람이 휙 불어오자, 산벚 꽃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햇빛에 반짝이며 하늘하늘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슬로모션 같다. 이곳에서는 시간도 느리게 갈 것만 같다.


산책을 마치고 집 근처에 다다르자 여기에도 꽃이 한창이다. 어느새 길쭉하게 자란 하얀 냉이꽃과 그보다 더 우뚝 솟은 갓꽃이 양지바른 곳을 가득 채웠다. 갓꽃은 얼핏 보면 유채꽃과 비슷해서 잎을 봐야 제대로 구분할 수 있다. 


갓꽃과 냉이꽃


화병에 꽂을 생각으로 냉이꽃과 갓꽃을 꺾는다. 남편에게 도와달라 하자 군소리 없이 몸을 움직인다. 꽃에는 관심 하나 없던 사람이 이곳에 와서는 꽃을 즐기고 꽃나무 이름을 곧잘 말한다. 시골의 봄은 남편의 가슴에도 싹을 틔웠다. 냉이꽃과 갓꽃 다발을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유독 따스했다.


화병에 담으니 수수한 꽃들이 집을 환히 밝혀준다. 저도 봄꽃이라고 계절을 닮아 청초하기까지 하다. 냉이꽃은 뭉쳐놓으니 안개꽃 같고, 휘어진 줄기 끝에 매달린 밝은 노란색 갓꽃은 마치 등불 같다.


환한 갓 등불을 바라보자니 이 꽃으로 요리를 해보고 싶어졌다. 동화 같은 풍경을 접시에도 담아보고 싶었다. 작은 꽃잎을 따서 먹어보니 청갓 맛이 난다. 알싸하고 매운맛이 나다가 마지막엔 쌉쌀함이 남는다. 기름기 있는 음식에 곁들이면 입안을 개운하게 해 줄 것 같다. 그래, 오늘의 요리는 오일 파스타다.



화병에 담긴 갓꽃을 몇 개 골라서 물에 살살 씻고 요리 준비를 했다. 샐러리를 벗기듯 꽃대의 껍질을 벗겨 데쳐봤는데 너무 질겼다. 꽃대를 볶아 쓰려고 했는데 포기하고, 꽃송이가 달린 부드럽고 얇은 꽃자루를 따로 준비했다. 꽃을 파스타 위에 뿌리면 보기도 좋고 매운맛도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작은 꽃도 몇 개 톡톡 뜯어서 미리 준비해뒀다. 


면을 삶는 동안 달군 팬에 들기름을 두르고 마늘, 고추, 꽃대를 볶아 향을 냈다. 질긴 꽃대는 향만 내고 빼냈다. 냉동실에 있던 새우도 구워 넣고, 면수도 넣고, 안초비 대신 액젓을 넣어 풍미를 더한다. 마지막으로 데친 꽃송이와 삶은 면을 넣은 다음, 불을 끄고 치즈를 뿌려 섞었다.


접시에 파스타를 담고 미리 따둔 갓꽃 꽃잎을 뿌렸다. 샛노란 꽃잎 덕에 화사한 파스타가 완성됐다. 갓꽃이 피어 있던 들판이 오롯이 담긴 한 그릇. 재료가 많이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한껏 풍성해 보인다.


포크로 면을 돌돌 말고 뾰족한 포크 끝으로 갓꽃을 콕 찍어 같이 먹었다. 들기름에 볶은 마늘의 고소함과 갓꽃의 쌉쌀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갓꽃의 톡 쏘는 매운맛이 전체적인 균형을 잡아 주었다.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은 즐거운 식사였다.



자연을 곁에 두고 산다는 건 꽤 감동적인 일이다.


숲 산책을 하는 동안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동화 속 세상을 거닐었다. 복잡하던 머리까지 덩달아 맑아졌다. 게다가 꽃을 보며 요리를 상상하고, 식탁 위에 봄 풍경을 온전히 담아내는 행복도 맛보았다. 이 청아한 계절은 들판에 핀 풀 하나로 진한 기쁨을 선사해 주는구나.




접시 위에 내려앉은 봄 풍경, 갓꽃 파스타

갓꽃, 파스타 면, 들기름, 마늘, 건고추, 액젓, 치즈, 소금, 후추


- 면은 삶고, 갓꽃송이는 살짝 데쳐 찬물에 담가둔다.

- 팬에 들기름을 두르고 꽃대, 마늘, 건고추를 볶아 향을 낸다.

- 향을 낸 꽃대는 빼내고, 면수를 넣어 팬을 흔든다.

- 액젓 한 숟가락으로 맛을 내고, 삶은 면과 데친 갓꽃송이을 넣고 섞은 후, 치즈와 후추를 뿌린다. 모자란 간은 소금으로 한다.

- 접시에 담은 후 한 송이씩 딴 갓꽃을 뿌린다.


다른 식용 꽃으로도 꽃 파스타를 만들 수 있어요. 갓꽃과 비슷하게 생긴 배추꽃이나 유채꽃은 단맛이 나니 데치는 과정은 생략하세요.




김창완님의 목소리로 듣는 <갓꽃 파스타>편


차례차례 바뀌는 계절, 이 멋진 지금을 봐.
훈훈하고 싱그러운 책.
계절이 바뀔 때마다, 마음이 고플 때마다 꺼내 읽게 될 책이다.
_김신회(에세이스트, 《가벼운 책임》 저자)

책을 읽다 보면 냉장고에 가까운 계절을 채우고 싶어진다.
나에게 수고스럽고 싶어진다.
_임진아(삽화가, 《오늘의 단어》 저자)


스쳐가는 계절을 붙잡아 아낌없이 누리는 오늘 치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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